풀 어시스트 군단에 전부 맡기고 마지막 라그나리온까지 지켜본 기록
『그랑블루 판타지 리링크』를 오랜만에 다시 시작했다.
예전에 할 때도 프로토 바하무트를 쓰러뜨리고, 장비와 진을 어느 정도 갖추고, 루시퍼에 도전할 수 있을 만큼은 진행해 둔 상태였다. 다만 시간이 비면 조작법은 잊어버린다. 적의 공격 패턴도 잊어버린다. 오랜만에 돌아온 플레이어에게 고난도 액션 게임 복귀는 보통 꽤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번 리링크는 조금 달랐다.
내가 잘할 필요가 없었다.
풀 어시스트와 CPU 동료를 키우다 보니, 어느새 이 게임은 '내가 직접 조작해서 적을 쓰러뜨리는 게임'이 아니라 최강의 자동 전투 부대를 만들고 그 활약을 구경하는 게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마지막 라그나리온까지 쓰러뜨렸다.
오랜만에 복귀했는데 CPU가 너무 강하다
복귀 직후에는 당연히 조작법을 꽤 잊어버린 상태였다.
루시퍼의 공격은 화려하고, 화면 가득 위험한 것들이 날아다닌다. 파라다이스 로스트는 맞아 줄 생각이 들지 않고, 위아래 양옆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보기에는 이미 '포도 같은 무언가'로밖에 안 보인다.
위에서 온다. 아래에서 온다. 옆에서도 온다.
직접 피하려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런데 풀 어시스트는 피한다.
내가 화면을 보며 "와, 장난 아니다, 장난 아니다" 하고 있는 동안, CPU 동료들은 담담하게 공격하고, 회피하고, 링크 어택을 성공시키며 오의 게이지를 채운다.
이제 나는 파티의 지휘관도 아니다.
전장에 서 있을 뿐인 관객이다.
첫 번째는 파라다이스 로스트, 다음은 디 엔드
최종 보스라기보다 시험관
후반부의 적들은 시험을 참 많이 낸다.
먼저 파라다이스 로스트로 공격을 피할 수 있는지 확인한다.
다음은 디 엔드로, 제한 시간 안에 필요한 화력을 낼 수 있는지 확인한다.
여기에 생존 시험, 위치 선정 시험, 기믹 처리, 달리기 구간까지 있다.
이쯤 되면 전투라기보다 실기 시험이다.
게다가 시험관 쪽은 매번 말이 거창하다.
"이걸 견딜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다음 시련이다" "이것이 마지막 시련이다"
이런 식으로 몇 단계나 과제를 내준다.
솔직히 전투 중에 달리기까지 시킬 줄은 몰랐다.
세계의 운명을 건 최종 결전일 텐데, 갑자기 "자, 여기서부터 달리세요" 하고 시작된다. 최종 보스전 한복판에 오래달리기 실기 시험까지 끼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풀 어시스트 군단은 그것도 처리한다.
시험관이 의기양양하게 문제를 낼 때마다 CPU가 정답을 맞힌다.
'시련'을 외치다가 그냥 져 버린 사람
최종 보스의 입장에서 보면 꽤 웃기다.
자신은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라서, 도전자에게 몇 번이나 시련을 내려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는 전부 돌파한다.
그래도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고,
"여기까지 오다니" "하지만 다음 시련은 어떨까" "이것이 마지막 시련이다"
하며 계속 시험한다.
그리고 결국 평범하게 진다.
상대의 애정이나 능력을 몇 번이고 시험하다가 정말로 버림받은 사람 같은 구도다.
나는 시련을 받고 있다는 느낌조차 별로 없다. CPU가 알아서 통과하니까 최종 보스가 혼자 신나서 혼자 과제를 늘리고, 결국 혼자 패배한다.
루시퍼와 바하무트 다음에 마지막 라그나리온
적으로서의 격으로 따지면 루시퍼는 역시 강하다.
신화 같은 외형. 세계의 종말을 떠올리게 하는 연출. 파라다이스 로스트. 디 엔드. 전용 음악과 최종 결전다운 분위기.
프로토 바하무트에게도 거대한 존재와 싸우고 있다는 실감이 있다.
그다음에 나온 것이 라그나리온이었다.
첫인상은 꽤 솔직했다.
그냥 골렘이거나 짐승 계열 아닌가?
자세히 보니 드래곤이다.
루시퍼, 바하무트가 나온 다음에 마지막이 대형 드래곤이라니.
RPG라면 보통 드래곤을 쓰러뜨린 뒤에 신에게 가는 순서다. 그런데 리링크에서는 신이나 창세급 존재를 쓰러뜨린 뒤에 마지막 드래곤이 나온다.
아무래도 마무리가 시원치 않다.
게다가 이름이 **'마지막 라그나리온'**이다.
'마지막 적'이라기보다 '마지막에 남은 한 마리' 같은 느낌이 든다.
세계를 끝내려는 절대악이라기보다, 멸종 위기종의 마지막 개체를 토벌하는 듯한 쓸쓸함까지 감돈다.
겉모습이나 움직임도 어딘가 본 적이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최종 보스라기보다 기존 대형 보스를 재구성한 것처럼 느껴진다.
루시퍼 다음에 이걸 내놓으니 아무래도,
"마지막이 이거면 괜찮은 건가?"
하는 생각이 남는다.
페델은 똑똑한 걸까, 뿔에 지식을 다 빼앗긴 걸까
후반부에는 오므니스 제갈리스라는 뭔가 중요해 보이는 말도 나온다.
세계의 근간이나 위험한 힘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는 있다.
설명을 맡은 페델도 지식인다운 말을 한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묘한 인상이 든다.
아는 것 같은데 단정하지 않는다.
거창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마지막은 추측으로 끝난다.
요약하면,
아마 얘네 대단할걸? 모르지만.
정도의 설명으로 들린다.
최종 보스급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금기일지도 모른다. 오므니스 제갈리스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모르지만.
페델이 똑똑한 건지 아닌 건지 끝까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저 거대한 뿔을 유지하느라 지식과 처리 능력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려한데 가볍다
리링크의 기술적인 쾌감
마지막 시련까지 진행하고 나서 새삼 느낀 건 이 게임의 가벼움이었다.
화면은 상당히 화려하다.
거대한 적이 움직이고, 레이저가 날아가고, 폭발이 일어나고, 이펙트가 겹치고, 아군 전원이 필살기를 쓴다.
그런데도 의외로 무거워지지 않는다.
몬스터 헌터 계열 게임에서 이만큼 화면을 번쩍거리게 하면 내 환경에서는 프레임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리링크는 화려함에 비해 동작이 안정적이다.
전투 전용 스테이지 구성, 그리는 범위의 설계, 이펙트 연출 방식 같은 것이 잘 최적화되어 있는 거겠지.
사람이 처리할 수 없을 만큼 화면이 화려해도 게임기와 CPU 캐릭터는 태연하다.
플레이어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하며 뒤처진다.
마지막은 전원 오의
하지만 첫 번째 사람에서 이미 죽어 있었다
라그나리온에게는 최종 보스로서 다소 아쉬운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마무리는 좋았다.
전투 막판에 전원의 오의가 이어졌다.
첫 번째 캐릭터가 오의를 쏜다. 두 번째가 이어진다. 세 번째, 네 번째로 체인이 이어지고, 마지막에 프로토 바하무트가 나타난다.
최종 결전의 피니시로는 완벽하다.
문제는 상대가 첫 번째 일격에 이미 죽어 있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 사람의 오의에서 HP가 이미 사라졌다.
그 뒤로는 전원이 펼치는 정식 오버킬이다.
그래도 연출은 멈추지 않는다.
동료 전원이 차례로 필살기를 꽂아 넣고, 마지막에는 프로토 바하무트가 거대한 일격을 내리친다.
결과적으로 라그나리온 자신에게 부족했던 최종 보스다움을 우리 쪽 연출이 채워 주었다.
'마지막 라그나리온'을 쓰러뜨렸다기보다, 마지막 적을 바하무트로 처리해서 이야기를 억지로 신화급 스케일로 되돌려 놓은 듯한 결말이었다.
플레이어는 필요했을까
클리어 타임은 빠르다.
평가도 높다.
CPU는 공격하고, 피하고, 오의를 쏜다.
나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면 진지하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 필요 없는 거 아냐?
리링크는 내가 캐릭터를 직접 조작하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렇지 않았다.
강한 CPU를 고르고, 장비를 갖추고, 진을 골라내고, 어빌리티 구성을 다듬는다.
그다음에는 그들을 전장으로 보낼 뿐이다.
그러니까 이건 액션 RPG보다 육성 시뮬레이션에 가깝다.
내 회피 실력을 올리기보다 CPU의 화력과 생존력을 올리는 편이 빠르다.
적의 공격 패턴을 외우기보다 어시스트가 전부 처리할 수 있는 구성을 만드는 편이 편하다.
결국 완성된 플레이 방식은,
풀 어시스트를 키우는 게임
이었다.
세계의 끝은 정말로 '끝'일까
라그나리온을 쓰러뜨린 뒤 이야기는 끝났다.
그때 조금 마음에 걸린 것이 루리아가 말하는 세계의 넓이였다.
이 세계의 구석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랑블루의 세계에는 수많은 하늘의 섬이 있고, 그 사이를 항로로 오간다. 우리가 사는 지구처럼 둥근 구체라는 보장은 없다.
계속 나아가면 반대편에서 돌아올 수 있을까.
아니면 정말로 끝이 있을까.
하늘 끝에 거대한 벽이 있어서 거기서 세계 자체가 끝날 가능성조차 있다.
하늘, 섬, 이세계, 별의 민족, 세계의 이치 같은 요소가 이렇게 뒤섞여 있다면 현실의 행성과 같은 구조일 필요는 없다.
라그나리온과의 전투는 끝났어도 세계 자체의 수수께끼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진행했기 때문에,
"이 세계는 결국 뭘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끝나 버린 뒤의 엔드 콘텐츠
그리고 이겨 버렸다.
끝나 버렸다.
시련도 돌파했다. 라그나리온도 쓰러뜨렸다. 프로토 바하무트도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스토리로 쫓아갈 것은 일단 없어졌다.
남는 것은 장비 파밍, 진 구성, 캐릭터 육성, 타임 어택, 고난도 반복 플레이.
완전히 엔드 콘텐츠의 세계다.
다만 나의 경우, 그 엔드 콘텐츠도 직접 조작으로 정복하는 방향이 아니다.
CPU를 더 강하게 만든다. 풀 어시스트 구성을 다듬는다. 어디까지 방치로 쓰러뜨릴 수 있는지 본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S++를 받는 부대를 만든다.
보통 엔드 콘텐츠는 플레이어의 실력을 시험하는 곳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디까지 나 자신을 불필요하게 만들 수 있는지 시험하는 곳
이 되었다.
마지막 시련을 돌파한 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키운 CPU 동료들이다.
그리고 그래도 괜찮다.
마치며
라그나리온은 시원치 않았지만 끝맺음은 멋졌다
루시퍼와 바하무트 다음에 재탕 느낌이 나는 대형 드래곤이 마지막에 나왔을 때는 솔직히 꽤 쓸쓸했다.
'마지막 라그나리온'이라는 이름도 최종 결전이라기보다 마지막 생존자 같은 느낌이 강하다.
페델의 설명도 "대단할 것 같아, 모르지만"으로 들린다.
최종 보스는 시련을 연발하고 달리기까지 시킨 끝에, 첫 번째 사람의 오의에 죽었다.
그래도 전원의 오의가 끝까지 이어졌고, 프로토 바하무트가 마무리했다.
적의 격이 조금 부족해도 아군의 화력과 연출로 억지로 막을 내릴 수는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작법을 잊어버린 복귀 유저도 풀 어시스트와 CPU 육성 덕분에 끝까지 갈 수 있었다.
이 게임은 액션을 잘하는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직접 피하지 못해도 된다. 적의 공격이 포도로밖에 안 보여도 된다. 파라다이스 로스트를 맞아 줄 생각이 안 들어도 된다.
강한 동료를 만들고, 나머지는 맡기면 된다.
『그랑블루 판타지 리링크』는 마지막에 뜻밖의 답을 가르쳐 주었다.
주인공이 싸우지 않아도 세계는 구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