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한 번, 상사나 선배의 언행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녹음도 했다. 윗선의 윗선까지 공유했다. 주의도 받았다. 그런데도 상대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노골적인 말투는 조금 줄었지만, 인사를 받아 주지 않고, 분위기로 압박하고, 빗대어 비꼬고, 평가하는 듯한 말로 몰아붙이는 식의 약한 무례로 옮겨 간다.
그럴 때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아직도 나한테 무례하게 굴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제 슬슬 좀 배웠으면 좋겠는데.
이런 위화감은 꽤 타당하다.
다만 상대의 머릿속에서는 내가 기대하는 식의 학습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내가 보는 흐름은 이렇다.
함부로 대한다
↓
녹음된다
↓
윗선에 공유된다
↓
주의를 받는다
↓
그러니 다음부터는 삼가야 한다
하지만 상대가 보는 흐름은 이럴 수도 있다.
너무 세게 말하면 귀찮아진다
↓
그래도 가벼운 무시나 분위기 압박 정도는 아직 괜찮다
↓
대놓고 말하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 있다
↓
상대는 아직 일은 해 준다
↓
그러니 아직 말해도 된다
즉 상대는 '무례를 그만두는 것'을 배운 게 아니라, 불이 잘 붙지 않는 무례로 바꾸는 법을 배우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글에서는 이것을 '아직 괜찮다' 판정이라고 부르겠다.
직장 내 인시빌리티란 무엇인가
직장 내 인시빌리티(workplace incivility)란, 쉽게 말해 직장에서 벌어지는 약한 강도의 무례한 행동이다.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 인사를 받아 주지 않는다
- 말을 끊는다
- 무시한다
- 차가운 태도를 보인다
- 깔보는 말투로 말한다
- 필요 이상으로 의심한다
- 낮게 평가한다
- 상대에 따라 태도를 바꾼다
- 빗대어 비꼬는 말을 한다
등등이다.
중요한 점은 직장 내 인시빌리티가 '의도가 모호하다'는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을 때도, 상대는 이렇게 둘러댈 수 있다.
못 들었을 뿐이다.
바빴을 뿐이다.
생각할 게 있었다.
악의는 없다.
차가운 태도를 보였을 때도,
지도하려던 거였다.
기대하니까 엄하게 했다.
상대가 너무 예민한 거다.
평소처럼 대했을 뿐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이 골치 아프다.
노골적인 괴롭힘보다 약한 무례는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 그래서 하는 쪽에서는 쓰기 편하다.
선택적 인시빌리티: 만만한 사람에게만 나오는 무례
더 골치 아픈 건, 인시빌리티가 모두에게 똑같이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세게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인사를 받아 주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하게 받아 준다. 어떤 사람에게는 야근, 연차, 리더십을 들이대며 몰아붙인다.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이처럼 무례가 특정한 사람에게만 향하는 경우가 있다.
연구에서는 이런 현상을 **선택적 인시빌리티(selective incivility)**라고 부르기도 한다. 노골적인 차별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무례가 성별, 인종, 나이, 지위, 관계 등에 따라 선택적으로 나타난다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상사 쪽이 무의식중에 이렇게 계산하는 일이 있다.
이 사람에게는 세게 말하기 어렵다.
이 사람에게 말하면 소문이 퍼진다.
이 사람에게 말하면 문제가 되기 쉽다.
이 사람은 반격할 것 같다.
이 사람은 말하기 쉽다.
이 사람은 감당해 낸다.
이 사람은 일은 해 준다.
이 사람이라면 좀 막 대해도 아직 괜찮다.
이렇게 되면 같은 무례라도 상대에 따라 일어날 확률이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만만한 사람만 고생하는 코스'다.
왜 '아직 괜찮다'고 생각할까
상대가 '아직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꽤 단순하다.
무례를 저질렀을 때의 비용이 상대 본인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상대가 무례하게 굴어서 내가 상처받고, 고민하고, 설명하고, 반박하고, 감정을 수습한다. 그런데 정작 상대 본인에게는 그만한 구체적인 비용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면 상대의 머릿속은 이렇게 된다.
무례를 드러낸다
↓
상대가 반응한다
↓
내 스트레스가 조금 빠진다
↓
업무는 돌아간다
↓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
아직 괜찮다
이러면 상대에게 무례는 비용이 낮은 행동이 된다.
게다가 직장 내 인시빌리티는 의도가 모호해서, 상대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쉽다.
지도하고 있을 뿐이다.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상대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나는 평범하게 대하고 있다.
상대가 과민한 것뿐이다.
이런 식으로 상대는 자신의 무례를 '지도', '기대', '성장 기회'로 바꿔 버린다.
이게 꽤 힘들다.
"자기 스트레스는 자기가 알아서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나는 상대의 스트레스를 처리해 주는 담당자가 아니다.
무거운 업무가 있다. 감사 때문에 예민하다. 윗선에서 압박이 내려온다. 월요일 아침이라 기분이 안 좋다. 직장 분위기가 무겁다.
그런 사정이야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만만한 상대에게 쏟아부어도 되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자기 스트레스
↓
자기가 처리한다
이것이 원래 가야 할 경로다.
그게 안 되면 이렇게 된다.
자기 스트레스
↓
만만한 상대를 찾는다
↓
야근, 연차, 리더십, 젊은 직원, 고생을 몽둥이 삼는다
↓
상대에게 무례를 드러낸다
↓
자신은 '지도했다'고 생각한다
↓
상대의 신경만 닳는다
이것은 매니지먼트가 아니다. 스트레스 방류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부하 직원을 배수관으로 쓰지 마라.
라는 이야기다.
자기 스트레스는 자기가 알아서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 그걸 부하 직원의 신경으로 정산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기분이 좋아지고 있을' 가능성
여기는 조심스럽게 말해야 한다.
상대가 정말 '기분 좋다'고 자각하면서 무례를 저지르는지는 알 수 없다. 거기까지는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구조만 보면, 무례가 화풀이처럼 작동하고 있는 경우는 있다.
예를 들어,
무거운 업무가 있다
감사 때문에 예민하다
윗선에서 압박이 내려온다
스스로는 소화가 안 된다
만만한 상대에게 튄다
야근, 연차, 리더십, 젊은 직원, 고생 등을 몽둥이 삼아 말한다
상대가 닳는다
자신은 '한마디 해 줬다', '지도했다'는 기분이 된다
이런 구조다.
이건 이미 매니지먼트가 아니다. 스트레스 방류다.
상대 머릿속에서는 '나는 지도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받는 쪽에서 보면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휘두르는 몽둥이일 뿐이다.
녹음하고 윗선에 공유해도 변하지 않는 이유
녹음도 하고 윗선에 공유도 했는데 왜 상대는 변하지 않을까.
상대가 '무례를 그만두는' 방향으로 학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학습한다면 이렇게 된다.
나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세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평가 기준이 모호했는지도 모른다.
무시나 차가운 태도는 그만두자.
모두에게 일관된 기준으로 대하자.
하지만 자기 객관화(메타인지)가 낮으면 학습은 이렇게 흘러간다.
너무 세게 말하면 윗선에 간다.
그러니 더 모호하게 하자.
대놓고 말하지 말고 분위기로 하자.
인사를 안 받아 주는 정도면 빠져나갈 수 있다.
빗대어 비꼬는 건 증거가 되기 어렵다.
이것은 반성이 아니라 회피 학습이다.
무례 자체를 그만두는 게 아니라, 불이 잘 붙지 않는 형태로 바꾸는 것이다. 이러면 내 신경은 계속 닳는다.
무례에는 '업무용 전류'를 흘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상대가 "제대로 배워 줬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메타인지가 낮은 상대에게 내 신경을 써 가며 학습시키는 건 비용이 너무 크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례 과금제다.
이것은 물리적인 보복이 아니다. 폭력도 아니다. 상대를 괴롭히는 일도 아니다.
무례가 나온 순간, 내 대응을 자동으로 사무 처리 모드로 전환하는 장치다.
무례 발생
↓
감정으로 받지 않는다
↓
업무 확인으로 되돌린다
↓
구체적으로 말하게 한다
↓
기록에 남긴다
↓
접촉을 끝낸다
이것이 업무용 전류다.
상대가 원하는 건 내 감정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내가 상처받는 것, 변명하는 것, 반박하는 것, 대신 받아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걸 돌려주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답한다.
업무상 필요한 내용이라면 구체적으로 알려 주세요.
평가 기준으로 필요한 내용이라면 구체적인 예를 들어 확인하고 싶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은 업무 지시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알겠습니다. 필요한 사항만 처리하겠습니다.
이것이 원숭이용 전기 바닥이다.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학습 실험에서 바닥에 약한 전류를 흘리는 장치에 빗댄 표현이다.)
무례 과금제의 목적
무례 과금제의 목적은 상대를 벌주는 것이 아니다.
목적은 내 신경을 공짜로 개방하지 않는 것이다.
무례를 당했을 때 가장 손해인 건, 상대의 처리되지 않은 스트레스를 내가 감정적으로 처리해 주는 일이다.
상대가 무례를 드러낸다
↓
내가 상처받는다
↓
내가 설명한다
↓
내가 고민한다
↓
내가 반성한다
↓
상대는 별로 곤란하지 않다
이러면 나만 적자다.
무례 과금제는 이 흐름을 바꾼다.
상대가 무례를 드러낸다
↓
나는 감정 처리를 하지 않는다
↓
업무 확인으로 바꾼다
↓
상대는 구체화를 요구받는다
↓
기록에 남는다
↓
접촉이 끝난다
상대에게는 무례의 이득이 줄어든다. 나에게는 신경의 유출이 줄어든다.
이게 중요하다.
답변 템플릿
평가하는 듯한 말을 들었을 때
평가 기준으로 필요한 내용이라면 구체적인 예를 들어 확인하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평가와 관련된 부분이라면, 어떤 행동을 개선하면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세요.
업무 지시인지 감정 섞인 말인지 모르겠을 때
지금 하신 말씀은 업무 지시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대응이 필요한 사항이라면 기한과 내용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빗대어 비꼬거나 분위기로 압박한다고 느꼈을 때
알겠습니다. 필요한 사항만 처리하겠습니다.
업무로 돌아가겠습니다.
야근, 연차, 근무 태도를 몽둥이 삼아 말할 때
평가상 필요한 기준이라면, 야근 시간이나 연차 사용이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업무에 영향이 있는 부분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알려 주세요.
기록 템플릿
감정이 아니라 사실을 남긴다.
날짜:
상황:
상대:
발언·행동:
나의 대응:
다른 팀원과 대하는 방식의 차이:
업무에 미친 영향:
과거의 비슷한 사례:
메모:
예시:
○월 ○일 월요일 아침
마라톤 대회 다음 날.
나는 이미 취소한 상태.
인사했는데 상대가 대답하지 않음.
반면 다른 팀원에게는 평소처럼 인사를 받아 줌.
과거에도 월요일 아침, 무거운 업무, 감사 전후에 비슷하게 차가운 태도를 보인 적 있음.
나에게만 야근, 연차, 리더십 등을 강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음.
이렇게 나중에 봐도 구조가 보이는 형태로 남긴다.
'상대를 바꾸기'가 아니라 '접촉 면적 바꾸기'
가장 중요한 건 상대를 너무 바꾸려 들지 않는 것이다.
물론 상대가 배워 준다면 가장 좋다. 무례를 그만둬 준다면 그게 제일 좋다. 자기 스트레스를 스스로 처리해 준다면 그게 제일 좋다.
하지만 상대가 그걸 못 한다면, 내가 상대의 메타인지를 키워 줄 필요는 없다.
내가 할 일은 상대의 학습이 아니라 나의 경계선 설계다.
상대의 무례를 너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상대의 스트레스를 받아 주지 않는다.
상대의 기분 몽둥이를 채점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무례가 나오면 업무 확인으로 되돌린다.
접촉 면적을 줄인다.
즉,
원숭이가 학습하지 않는다면, 내가 거리와 반응을 바꾼다.
이걸로 충분하다.
정리: 자기 스트레스는 자기가 알아서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
직장 내 인시빌리티는 강도가 약하고, 의도가 모호하고, 둘러대기 쉽다.
그래서 만만한 사람에게만 나오기 쉽다. 그래서 상대는 '아직 괜찮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내 신경이 조금씩 닳는다.
하지만 나는 상대의 스트레스 배수관이 아니다.
자기 스트레스는 자기가 알아서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 부하 직원의 신경으로 정산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이것이 본질이다.
무례에는 감정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업무 확인으로 되돌린다. 구체적으로 말하게 한다. 기록에 남긴다. 접촉을 끝낸다.
이것이 무례 과금제다.
한마디로 하면,
아직 괜찮다고 생각하지 마라. 지금부터 무례에는 업무용 전류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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