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유독 일이 마구 날아드는 날이었다.
신입사원 대응이 있었다. 오전에는 내가 교육 커리큘럼을 짜서 진행하고, 오후부터는 현장 쪽에 인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맡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뿐인데, 그 사람이 갑자기 회의에 들어가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날아온 게 바로 이거다.
오늘 하루는 그쪽에서 좀 봐줄 수 없어?
짜증 난다.
예전의 나라면 아마 "뭐, 곤란해하니까", "신입도 불쌍하고", "내가 하는 게 빠르니까" 하면서 그냥 떠안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먼저 "현장 리더는요?"라고 물었다. 원래 이 일을 받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 확인한 것이다.
그다음 리더와 이야기를 했다. 나도 오후 내내는 무리다. 가르칠 수 있는 부분은 가르치겠지만 길어야 한두 시간. 나머지는 선배 옆에서 따라다니게 한다. 이미 동영상 교재로 만들어 둔 부분은 동영상으로 대신한다.
이렇게 합의를 봤다.
즉, 전부 줍지는 않았다.
업무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하루 종일 묶이는 구조는 만들지 않는다.
이게 중요했다.
같은 날 다른 사람에게서도 "키오스크 단말기인지 컴퓨터인지가 안 켜져요. 저는 회의라 못 가니까 좀 처리해 주세요"라는 요청이 날아왔다.
이것도 거절했다.
저는 잘 모르니까 담당 부서에 확인해 보세요.
이게 맞았다.
손을 대는 순간, 왜인지 내가 대응 담당자가 된다. 안 고쳐지면 "언제부터요?", "누가 만졌어요?", "뭘 했어요?" 하는 질문에 휘말린다. 담당 밖의 기계 문제는 선의로 만질수록 위험하다.
오늘은 이런 일이 많았다.
곤란한 사람이 있다. 담당자는 없다. 가까이에 내가 있다. 그래서 날아온다.
이런 직장을 나는 요즘 "구멍 난 동물원"이라고 부른다.
담당, 책임 범위, 받아 줄 곳, 절차에 구멍이 나 있다. 그 구멍으로 일이라는 동물이 도망쳐 나온다. 그리고 먼저 알아챈 사람, 거절 못 하는 사람, 어떻게든 처리하는 사람이 그걸 잡는다.
방치하면 그 사람은 만능 해결사가 된다.
그래서 필요한 건 근성이 아니다.
울타리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영역전개 사쿠사쿠 판다.
(애니메이션 『주술회전』의 '영역전개'에 빗댄 말장난이다. 사쿠사쿠 판다는 일본의 바삭한 판다 모양 쿠키 이름이다.)
내 주위에 일의 울타리를 펼치는 것이다.
모든 걸 거부하는 건 아니다. 필요한 협력은 한다. 다만 책임 범위의 구멍에서 도망쳐 나온 일을 맨손으로 끝없이 잡아 주지는 않는다.
울타리는 내가 직접 세운다.
그것이 사쿠사쿠 판다다.
'비정당 업무'라는 이름이 있다
이 감각은 그냥 투정이 아니다.
직업 심리학에서는 이런 업무를 **비정당 업무(illegitimate tasks)**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정당 업무란 대략 말해서 "이게 정말 내가 해야 하는 일인가?" 싶은 일을 말한다. 연구에서는 주로 두 종류로 나눈다.
첫째는 unreasonable tasks(부당한 업무). 자기 역할, 직무, 전문성, 권한의 범위를 벗어났는데도 맡겨지는 일이다.
둘째는 unnecessary tasks(불필요한 업무). 애초에 쓸모가 없거나, 조직 구조가 나빠서 생겨났거나, 원래라면 안 해도 될 일이다.
비정당 업무가 힘든 건 단순히 귀찮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작업 자체는 쉬운 경우가 많다.
문제는 그 일이 이런 메시지로 전달된다는 점이다.
당신의 시간은 가볍게 다뤄도 된다. 당신의 전문성은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이 곤란해져도 조직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화가 난다.
무거운 일이라서 싫은 게 아니다.
가볍게 취급받는 느낌이 들어서 싫은 거다.
연구에서도 비정당 업무는 "내가 하지 않아야 한다고 느끼는 일"이며, 단순한 업무량 과다와는 다른 스트레스 요인으로 다뤄진다. 업무상의 역할과 직업적 정체성을 위협하고, 스트레스, 번아웃, 직무 만족도 저하와 관련이 있다고 지적된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이게 왜 나한테 오는 거야?" 하는 짜증은 꽤 구조적인 문제다.
구멍 난 동물원이란 무엇인가
구멍 난 동물원이란 책임 범위에 구멍이 뚫린 직장을 말한다.
동물원이라면 원래 우리가 있다.
어떤 동물이 어디에 있는지. 누가 돌보는지. 먹이는 언제 주는지. 탈출하면 누가 대응하는지.
그런 설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직장 업무에서는 그게 모호해진다.
예를 들면 이런 구멍이 있다.
- 담당자가 한 명뿐이다
- 그 사람이 회의에 들어가면 대신할 사람이 없다
- 현장 리더에게 확인하지 않고 가까운 사람에게 던진다
- 구두로 부탁해서 책임 범위가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 '할 수 있는 사람'이 매번 흡수한다
- 나중에 다른 사람이 이상론으로 참견한다
- 그런데 그 자리에서 봐 줄 사람, 손을 움직일 사람은 늘지 않는다
이 상태에서는 일이 계속 도망쳐 나온다.
게다가 골치 아픈 건, 도망쳐 나오는 일 대부분이 겉보기에는 작다는 점이다.
"한 시간만 봐 줄 수 없어?" "컴퓨터 좀 봐 줄래?" "이 스캔만 부탁해도 될까?" "신입이 한가해 보이는데 뭔가 시키면 안 돼?" "그래도 교육은 제대로 해 줘." "나는 회의라 못 가니까 대신 처리해 줘."
하나하나는 작다.
하지만 전부 주워 담으면 하루가 죽는다.
더 나쁜 건, 줍는 순간 "그 사람이 담당인 것처럼" 된다는 점이다.
선의로 한 번 잡아 주면, 다음부터 그 동물은 내 우리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만능 해결사화다.
영역전개 사쿠사쿠 판다란 무엇인가
영역전개 사쿠사쿠 판다란, 일이 내게 들어오기 전에 책임 범위, 시간 상한, 판단 권한, 돌려보낼 곳을 분명히 해 두는 기술이다.
멋있게 말했지만 하는 일은 단순하다.
일이 날아왔을 때 바로 끌어안지 않는다.
먼저 울타리를 친다.
울타리는 네 종류가 있다.
1. 관할의 울타리
이건 누구의 일인가.
내가 판단할 수 있는가. 담당 부서가 있는가. 현장 리더가 있는가.
오늘 신입사원 대응에서는 처음에 "현장 리더는요?"라고 물었다. 이게 관할의 울타리다.
오늘 PC 문제에서는 "저는 잘 모르니 담당 부서로"라고 답했다. 이것도 관할의 울타리다.
2. 시간의 울타리
협력하더라도 어디까지 할 것인가.
하루 종일 볼 것인가. 한두 시간만인가. 설명만 하는가. 동행으로 바꾸는가.
이걸 모호하게 두면 "잠깐만"이 오후 전부가 된다.
이번처럼,
제가 대응할 수 있는 건 최대 한두 시간입니다. 나머지는 현장에서 대응해 주세요.
라고 정해 두면 흡수하는 범위가 멈춘다.
3. 판단의 울타리
내가 판단해야 하는 일인가, 그냥 정형화된 작업인가.
예를 들어 스캔이나 저장 같은 작업이라도 근로계약서 같은 민감한 정보를 다룰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중요한 건 내용 판단을 맡기지 않는 것이다. 저장 위치, 원본 관리, 확인자를 정해 둔다.
"간단한 작업이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돼"가 아니라 "판단은 누가 갖는가"를 나눈다.
4. 기록의 울타리
구두로 싸우면 이야기가 갈라진다.
"아니, 그래도" "신입한테는 교육을" "보통은 이렇게 하지 않나" "전에는 해 줬잖아"
이렇게 되면 지친다.
그래서 필요하면 채팅으로 정리해서 보낸다.
입사 교육은 이미 여러 번 견학을 마쳤고, 절차서, 대본, 동영상 교재도 전달했습니다. 오늘은 추가 견학보다 오후에 들어 주는 역할을 맡아 대본을 사용한 통 연습을 할 예정입니다. 오전의 빈 시간에는 교육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간단한 정형 작업으로 스캔을 부탁드렸습니다. 스캔은 내용 판단을 하게 하는 작업이 아니며, 저장 위치와 원본 취급도 제가 확인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앞으로는 교육 시간과 보조 작업 시간이 섞여 보이지 않도록 구분해서 진행하겠습니다.
이거면 된다.
구두로 이길 필요는 없다.
울타리를 치면 된다.
거절이 목적이 아니다. 만능 해결사가 되지 않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를 잘못 이해하면 그냥 비협조적인 사람이 된다.
사쿠사쿠 판다는 뭐든 거절하는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필요한 협력은 한다.
오늘 신입사원 대응에서도 완전히 쳐낸 건 아니다. 현장 리더에게 확인하고, 내가 가르칠 수 있는 부분은 가르친다. 한두 시간은 대응한다. 동영상 교재도 쓴다. 선배 옆에 붙인다.
일을 멈춘 게 아니다.
다만 하루 전체를 흡수하지는 않았다.
여기가 중요하다.
협력과 만능 해결사화는 다르다.
협력이란 목적, 범위, 시간, 책임이 보이는 것이다.
만능 해결사화란 목적, 범위, 시간, 책임이 모호한 채로 '할 수 있는 사람'에게 흘러드는 것이다.
사쿠사쿠 판다는 후자를 전자로 바꾸는 기술이다.
세 가지로 나누면 판단하기 쉽다
날아온 일은 세 가지로 나누면 좋다.
| 분류 | 상태 | 대응 |
|---|---|---|
| 정당한 업무 | 내 역할, 책임 범위, 성과와 이어진다 | 평소대로 한다 |
| 조건부 협력 | 내 본업은 아니지만 짧은 시간, 분명한 범위로 협력할 의미가 있다 | 상한을 정하고 한다 |
| 돌려보낼 업무 | 관할 밖, 판단 불가, 책임자 불명, 무한 흡수가 된다 | 담당 부서·책임자에게 돌려보낸다 |
오늘 사례로 말하면, 신입사원 대응의 오전 교육 커리큘럼은 정당한 업무에 가깝다.
오후에 현장 쪽이 못 보게 된 구멍을 하루 종일 내가 흡수하는 건 돌려보낼 업무에 가깝다.
다만 현장이 곤란하니 한두 시간만 설명해 준다면 조건부 협력이다.
키오스크 단말기나 PC 고장은 관할 밖이고 판단도 못 하니 돌려보낼 업무다.
이 분류를 머릿속에 두면 "부탁받았으니까 한다"가 줄어든다.
부탁받은 순간 이렇게 생각한다.
이건 정당한 업무인가? 조건부 협력인가? 아니면 구멍에서 도망쳐 나온 동물인가?
구멍에서 도망쳐 나온 동물이라면 맨손으로 잡지 않는다.
울타리를 친다.
자주 쓰는 채팅 문구
관할 밖의 일을 돌려보낼 때
죄송하지만 이쪽에서는 판단할 수 없어서 담당 부서에 확인 부탁드립니다.
회의를 이유로 일이 날아왔을 때
저도 원래 진행 중인 업무가 있어서 제가 계속 대응하기는 어렵습니다.
담당 부서나 현장 리더께 직접 확인 부탁드립니다.
협력은 하되 상한을 자를 때
제가 설명할 수 있는 범위는 도와드리겠지만 오후 내내 대응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응할 수 있는 건 한두 시간 정도까지이고, 그 이후는 현장에서 대응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지적받았을 때
전제를 공유드립니다.
이 건은 교육, 작업, 확인 시간을 나누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교육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정형 작업을 부탁드렸고, 판단이 필요한 부분은 제가 확인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앞으로도 섞여 보이지 않도록 구분해서 진행하겠습니다.
구두로 길어질 것 같을 때
인식이 어긋나지 않도록 정리해서 채팅으로 공유드리겠습니다.
이게 강력하다.
그 자리에서 감정으로 싸우지 않는다.
글로 정리해서 울타리를 친다.
'그림자를 지우는' 날도 있다
오늘은 도중에 "그림자를 지워야겠다" 싶었다.
그래도 된다.
직장에는 분명히 일이 날아들기 쉬운 날이 있다.
누군가 회의에 들어간다. 담당자가 자리를 비운다. 돌발 대응이 겹친다. 신입 대응이 있다. PC가 고장 난다. 현장이 막힌다.
그런 날은 선의의 받이가 되면 지는 거다.
존재감을 지운다.
내가 줍지 않아도 되는 일은 관할로 돌려보낸다.
최소한만 돌려준다.
채팅에 남긴다.
길게 말하지 않는다.
이건 도망이 아니다.
책임 범위를 지키는 행동이다.
사쿠사쿠 판다의 본질
사쿠사쿠 판다의 본질은 차가워지는 게 아니다.
내 선의가 구멍 난 구조에 먹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착한 사람, 처리가 빠른 사람, 구조화를 잘하는 사람,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사람일수록 구멍 난 동물원에서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일이 도망쳐 나왔을 때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잡는다.
잡는 사람이 있으니 구멍이 방치된다.
구멍이 방치되니 또 일이 도망쳐 나온다.
이 순환을 끊으려면 내가 전부 잡는 걸 그만둬야 한다.
그 대신 울타리를 친다.
그건 누구 관할인가요? 제가 볼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그 이후는 현장에서 부탁드립니다. 제가 판단할 수 없으니 담당 부서에 부탁드립니다. 인식이 어긋나지 않도록 채팅으로 공유드리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꽤 달라진다.
일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일이 지나가는 길을 정리하는 것이다.
만능 해결사를 그만두고 업무 설계자가 된다.
그것이 영역전개 사쿠사쿠 판다다.
정리
일하면서 지치는 건 작업량 때문만이 아니다.
"왜 이걸 내가 하지?"가 모호한 일은 사람을 깎아 먹는다.
내 시간이 가볍게 취급받는다. 전문성이 존중받지 못한다. 곤란할 때만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던져진다.
그렇게 느껴지는 일은 비정당 업무가 되기 쉽다.
그리고 비정당 업무가 생기기 쉬운 직장은 구멍 난 동물원이 되어 있다.
그러니 필요한 건 참는 게 아니다.
울타리다.
관할의 울타리. 시간의 울타리. 판단의 울타리. 기록의 울타리.
이 네 가지를 친다.
전부 줍지 않는다. 하지만 필요한 협력은 한다. 상한을 정한다. 담당에게 돌려보낸다. 채팅에 남긴다. 그림자를 지우는 날도 만든다.
그렇게 내 주위에 일의 경계선을 펼친다.
영역전개 사쿠사쿠 판다.
이것은 직장에서 차가워지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내 선의와 전문성이 구멍 난 구조에 먹히지 않게 하기 위한 기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