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분명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또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
만화를 읽었다.
밥도 먹었다.
이불 속에도 있었다.
스마트폰도 봤다.
일을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쉬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뭔가가 돌아가고 있다.
"그게 대체 뭘까?"
"이거 구조로 보면 어떤 거지?"
"이 찜찜한 느낌,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이 이야기, 다른 각도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쉬고 있는데도 머릿속 검색창이 닫히지 않는다.
몸은 앉아 있다.
일정도 잡아 두지 않았다.
겉으로 보면 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MP는 회복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휴식에는 HP 휴식과 MP 휴식이 있다
먼저, 휴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게임에서 HP는 체력, MP는 마법을 쓸 때 소모되는 에너지다. 여기서는 MP를 머리와 신경의 에너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바로 HP 휴식과 MP 휴식이다.
HP 휴식은 몸의 회복이다.
- 앉는다
- 잔다
- 눕는다
- 운동을 멈춘다
- 움직이지 않는다
- 몸을 쓰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이런 쉬는 방식이다.
반면 MP 휴식은 머리와 신경의 회복이다.
- 생각거리를 닫아 둔다
-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는다
- 판단하지 않는다
- 비교하지 않는다
- 혼자 반성회를 열지 않는다
- 내일의 불안을 처리하려고 하지 않는다
- 찜찜한 느낌에 이름을 붙이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쉬는 방식이다.
문제는 HP를 쉬게 해도 MP는 계속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불 속에서도 생각한다.
만화를 읽다가도 중간에 인생의 구조를 생각한다.
산책하면서도 일이며 연애며 앞날을 따져 본다.
스마트폰을 보면서도 정보를 처리한다.
이러면 몸은 쉬고 있어도 뇌는 일하고 있는 셈이다.
쉬지 못하는 이유 1: 심리적 분리가 안 되고 있다
쉬는 중인데 쉬어지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이 '심리적 분리(psychological detachment)'다.
심리적 분리란 쉽게 말해 일이나 문제에서 마음이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저 직장을 나서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저 노트북을 덮는 것만으로도 안 된다.
머릿속에서 그 문제로부터 떨어져 있느냐가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 퇴근했는데도 상사가 한 말을 계속 곱씹고 있다
- 쉬는 날인데도 다음 주 업무 순서를 짜고 있다
- 연애가 끝났는데도 몇 번이고 다시 따져 보고 있다
- 집에서 만화를 읽는데도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다른 문제가 돌아가고 있다
몸은 쉬고 있지만 마음은 떠나지 못한 상태다.
연구에서도 심리적 분리는 퇴근 후 회복이나 피로감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으로 다뤄진다.
즉, 쉬려면 '그 자리를 떠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머릿속 회의실의 문을 닫아야 한다.
쉬지 못하는 이유 2: 끝내지 못한 일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쉬지 못할 때는 머릿속에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끝내지 못한 일이란, 아직 매듭짓지 못한 문제를 말한다.
- 그 사람과의 관계는 어땠던 걸까
- 내 판단은 옳았을까
- 회사 문제는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 이 글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 이 찜찜함에는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 남는다.
그리고 뇌는 끝나지 않은 것을 닫고 싶어 한다.
그래서 쉬려고 해도 문득 검색창이 열린다.
"그게 대체 뭘까?"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
물음이 떠오르면 뇌는 답을 찾기 시작한다.
답이 보이기 시작하면 더 생각하고 싶어진다.
이름표를 찾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구조가 보이면 더 파고들고 싶어진다.
그렇게 쉬는 시간이 생각하는 시간으로 바뀌어 버린다.
쉬지 못하는 이유 3: 주의 잔여물이 남아 있다
작업을 바꾼 뒤에도 앞의 작업 일부가 머릿속에 남아 있을 때가 있다.
이것을 '주의 잔여물(attention residue)'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글을 쓰고 나서 만화를 읽는다.
그런데 머리 한구석에서는 아까 쓴 글의 제목이나 구성을 생각하고 있다.
일을 마치고 요리를 한다.
그런데 머리 한구석에서는 내일 회의와 상사의 반응을 생각하고 있다.
연애에 대해 생각하고 나서 게임을 한다.
그런데 머리 한구석에서는 상대와의 관계와 이별의 의미를 다시 따져 보고 있다.
이 상태에서는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주의력 일부가 앞의 문제에 붙잡혀 있다.
그래서 쉬는 중이라고 생각해도 뇌 일부는 아직 앞의 일을 처리하고 있다.
"만화를 읽는데도 쉬는 것 같지 않아."
"산책하는데도 머리가 쉬지 못해."
"누워 있는데도 피로가 안 풀려."
이럴 때는 주의 잔여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쉬지 못하는 이유 4: 반추와 깊이 파고들기의 경계가 흐려진다
생각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생각하는 힘이 있는 사람은 강하다.
찜찜한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자기 감정을 정리할 수 있다.
상대와의 관계를 점검할 수 있다.
업무상의 문제를 구조화할 수 있다.
다음에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은 꽤 중요한 능력이다.
다만 반추와 깊이 파고들기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깊이 파고들기는 생각한 결과 정리가 진행된다.
이름표가 붙는다.
다음 행동이 보인다.
마음이 가벼워진다.
쓸 수 있는 형태가 된다.
반추는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바뀌지 않는다.
기분만 무거워진다.
과거의 장면이 재생된다.
답보다 피로가 늘어난다.
문제는 깊이 파고드는 데 능한 사람일수록 반추도 고도화되기 쉽다는 것이다.
보통의 반추라면 같은 생각을 되풀이하다 끝난다.
하지만 구조화에 능한 사람은
- 관점을 바꾸고
- 이름표를 붙이고
- 과거의 기억과 연결하고
- 사회 구조로 넓히고
- 글로 쓰고
- 그 글을 다시 여러 편으로 쪼개는
식으로, 반추를 고성능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이것은 강점이기도 하다.
다만 쉬는 중에 하면 MP를 쓴다.
쉬지 못하는 이유 5: 과몰입(하이퍼포커스)·몰입 상태(플로)에 들어가 있다
좋아하는 일, 관심 있는 일, 의미를 느끼는 일에는 강하게 집중할 때가 있다.
이건 꽤 기분 좋다.
"정신 차리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전혀 피곤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즐겁다."
"더 할 수 있겠다."
"머리가 저절로 돌아간다."
이런 상태다.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의 맥락에서는 관심 있는 활동에 강하게 집중하는 과몰입이 보고되어 있다.
또 심리학에서는 활동 자체에 푹 빠져드는 몰입(플로) 상태도 연구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무언가를 진단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주관적으로는 즐거워도 뇌와 신경의 자원은 소모되고 있다는 점이다.
즐거운 작업은 피로를 느끼기 어렵다.
의미 있는 작업은 멈추기 어렵다.
구조가 보이는 작업은 다음 물음을 낳는다.
그래서 쉬려던 날에도
"이것만 쓰자."
"이거 한 편만 정리하자."
"제목만 뽑아 두자."
"아니, 본문까지 갈 수 있겠는데?"
하는 식이 된다.
정신 차리고 보면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었을 텐데 글을 여러 편이나 써 놓았다.
이것은 재능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MP 소모이기도 하다.
쉬지 못하는 이유 6: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도 뇌에게는 일이다
쉬는 날에 만화를 읽는다.
애니메이션을 본다.
영화를 본다.
SNS를 본다.
유튜브를 본다.
이런 것들은 휴식이 될 때도 있다.
다만 정보량이 너무 많으면 뇌에게는 일이 된다.
특히 생각하는 버릇이 강한 사람은 그냥 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만화를 읽는다.
캐릭터의 행동을 분석한다.
이야기 구조를 생각한다.
자기 인생과 연결한다.
글의 도입부를 찾아낸다.
사회 구조로 넓힌다.
이러면 오락이 생각의 연료가 된다.
물론 그게 나쁜 건 아니다.
다만 MP를 회복하고 싶을 때는 정보량이 많은 오락이 오히려 부담이 되기도 한다.
정말로 MP를 회복하고 싶다면
- 논길 산책
- 목욕
- 샤워
- 멍하니 있기
- 음악만 틀어 두기
- 가벼운 스트레칭
- 바깥 공기 쐬기
- 이불에 푹 파묻히기
처럼 해석하거나 분석할 거리가 적은 쉬는 방식이 필요하다.
'피곤하지 않아'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위험하다
쉬지 못하는 사람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별로 피곤하지 않아."
"재미있으니까 괜찮아."
"싫은 일이 아니라서 괜찮아."
"오히려 머리가 잘 돌아가."
"오늘도 아직 더 할 수 있어."
이것은 절반은 맞다.
불쾌한 피로감이 없다.
즐겁다.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고 있다.
얻는 게 있다는 느낌이 있다.
이건 사실이다.
하지만 몸과 신경의 소모가 0이라는 뜻은 아니다.
주관적으로는 피곤하지 않아도 나중에 오래 자게 되기도 한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기도 한다.
다음 날 아침 머리가 무겁기도 한다.
밤에 이상한 '미래 회의'가 시작되기도 한다.
판단이 거칠어지기도 한다.
즉,
피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피로를 느끼기 어려운 종류의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좋아하는 일, 의미 있는 일,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일, 자기 강점이 드러나는 일일수록 일어나기 쉽다.
MP가 줄어들고 있다는 신호
쉬는 중이라고 생각해도 MP가 줄어들고 있을 때는 신호가 있다.
- 아무것도 안 할 계획이었는데 뭔가 시작해 버린다
- 같은 주제를 몇 번이고 생각한다
- 사소한 찜찜함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진다
- 만화나 SNS에서 바로 글감이 떠오른다
- 쉬고 있는데 머릿속 한구석에서 회의가 열린다
- 자도 자도 졸리다
- 밤에 미래 회의가 시작된다
- 판단을 서두르고 싶어진다
- 연락이나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진다
- 몸은 움직일 수 있지만 마음의 여유가 적다
-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거야"라고 하면서 뭔가를 여러 개 만들고 있다
이 상태는 능력이 높기 때문에 일어난다.
다만 MP가 빨간 게이지일 때 메테오를 쏘면 나중에 반동이 온다.
쉬는 데 필요한 것은 생각을 금지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힘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지 마."
"깊이 파고들지 마."
"글 쓰지 마."
"창작하지 마."
이런 게 아니다.
생각하는 힘은 강점이다.
찜찜한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건 가치 있는 일이다.
글로 만들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문제는 쉬는 날에 전부 본문으로 써 버리는 것이다.
쉬는 날의 규칙은 이 정도면 된다.
떠오르는 건 OK.
깊이 파고드는 건 내일.
오늘은 제목만.
즉, 생각을 완전히 멈출 필요는 없다.
다만 출력 수준을 낮춘다.
- 본문을 쓰지 말고 제목만
- 글로 만들지 말고 메모만
- 결론을 내지 말고 물음만 저장
- 판단하지 말고 내일의 나에게 넘기기
- 보내지 말고 임시 저장함에 두기
이렇게 하면 머릿속 검색창을 완전히 닫지 못해도 MP 소모를 꽤 줄일 수 있다.
쉬는 법 실전 규칙
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쉬는 법을 꽤 구체적으로 정해 두는 편이 좋다.
1. 제목만 메모한다
뭔가 떠올라도 본문은 쓰지 않는다.
"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쉬어지지 않는 이유"
"설렘이냐 사랑이냐 문제"
"구멍 뚫린 결혼식장"
이처럼 제목만 저장한다.
그러면 뇌가 조금 안심한다.
2. 글로 쓰는 건 다음 날로 미룬다
그 자리에서 글로 만들지 않는다.
다음 날 봐도 필요하면 쓴다.
다음 날 봤을 때 별것 아니면 그대로 버린다.
이렇게 하면 충동적인 출력을 줄일 수 있다.
3. 정보량이 적은 휴식을 넣는다
만화, 영화, SNS도 휴식이 되지만,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는 연료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정보량이 적은 휴식을 넣는다.
- 산책
- 목욕
- 샤워
- 스트레칭
- 멍하니 바깥 보기
- 따뜻한 음료
- 이불
- 음악만 듣기
이런 휴식이 필요하다.
4. 밤에는 인생 회의를 닫는다
밤에 깊이 파고들면 MP가 더 줄어든다.
특히 일, 연애, 앞날, 돈, 퇴사, 결혼, 친척 이야기는 무겁다.
밤에는
"이건 내일의 안건이야."
"오늘은 초식 모드야."
"지금은 판단하지 않아."
이 정도면 된다.
5. 쉬는 날에도 영업 종료 시간을 만든다
뭔가 만드는 걸 즐기는 사람일수록 영업 종료 시간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오늘은 오후 4시 이후에는 본문을 쓰지 않는다."
"밤에는 제목 메모만."
"밤 10시 이후에는 인생 회의 금지."
"깊이 파고들기는 오전에만."
이런 식이다.
즐거우니까 더더욱 영업 종료 정리가 필요하다.
MP 회복에 맞는 휴식
MP를 회복하고 싶을 때는 다음과 같은 휴식이 맞는다.
- 걷기
- 욕조에 몸 담그기
- 뜨끈한 샤워 하기
- 자연 바라보기
- 논이나 강변 걷기
- 이불에 푹 파묻히기
- 가볍게 몸 움직이기
- 음악만 듣기
- 맛있는 음식 먹기
-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시간 만들기
- 무언가를 해결하지 않는 시간 만들기
핵심은 의미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쉬는 것까지 의미를 부여하면 MP를 쓴다.
"이 산책에서 뭘 얻을 수 있을까?"
"이 만화로 글을 쓸 수 있을까?"
"이 피로는 무슨 구조일까?"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또 검색창이 열린다.
그러니 쉴 때는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그냥 걷는다.
그냥 씻는다.
그냥 먹는다.
그냥 잔다.
이게 의외로 중요하다.
정리: 쉬는 중이라도 머릿속 검색창이 열려 있으면 쉬지 못한다
쉬는 중인데 쉬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몸이 쉬고 있어도 머릿속 검색창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게 대체 뭘까?"
"이 찜찜함은 뭐지?"
"구조화할 수 있지 않을까?"
"이름표를 붙일 수 있지 않을까?"
"글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물음이 떠오르면 MP는 소모된다.
생각하는 힘은 강점이다.
깊이 파고들 수 있는 것도 재능이다.
찜찜한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가치다.
하지만 쉬는 날에 그걸 전부 본문으로 써 버리면 더는 휴식이 아니다.
쉬려면 HP뿐 아니라 MP도 회복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 마음으로 문제에서 떨어져 나오기
- 끝내지 못한 일을 일단 메모로 빼 두기
- 주의 잔여물 줄이기
- 반추와 깊이 파고들기를 구분하기
- 떠올라도 제목만 적기
- 정보량이 적은 휴식 넣기
- 밤에는 인생 회의 닫기
이런 것이 필요하다.
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머릿속 검색창을 닫는 것이다.
적어도 검색 결과를 전부 글로 쓰지는 않는 것이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한 날이라면, 물음이 떠올라도 제목만 메모하고 영업을 종료하자.
그거면 충분하다.
MP가 빨간 게이지인 날에 필요한 것은 더 깊은 답이 아니다.
여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