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인만 하면 끝날 일이 왜 직장에서는 범인 찾기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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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는 원래 몇 분이면 끝나야 할 일이 있다.

예를 들어 매달 보내는 직원 명부에 '직위'가 들어 있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확인해 보니 이랬다.

4월: 직위 없음
5월: 직위 없음

이걸로 현황 파악은 끝이다.

다음에 할 일은 간단하다.

지금까지는 직위 없이 운영해 왔습니다.
앞으로 직위가 필요하시면 항목에 추가하겠습니다.
16일 발행분에 쓰실 거라면 필요한 날짜와 기준일을 확인하겠습니다.

이러면 된다.

그런데 어떤 직장에서는 이 단순한 이야기가 이상하게도 '범인 찾기'나 '실수 판정'으로 바뀌어 버린다.

네 실수일 수도 있잖아
대충 답했다가 혼나는 건 싫으니까
일단 현황 파악이 먼저야
빨리 해. 나 이따 회의 있어
그건 별개의 얘기고
지적한 사람이 틀렸다는 거야?

이렇게 되면 일은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필요한 건 과거에 대한 유죄 판결이 아니다.
필요한 건 앞으로의 규칙을 정하는 일이다.

'4월 없음, 5월 없음'은 현황 파악일 뿐, 재판의 증거가 아니다

지난 자료를 확인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현황을 파악하려면 필요할 때도 있다.

이번처럼

4월에는 직위가 들어 있었는지
5월에는 직위가 들어 있었는지

를 확인하는 건 현황 파악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 결과가

4월 없음
5월 없음

이었다면, 거기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우선 이것이다.

지금까지는 직위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그 다음에는 이렇게 정하면 된다.

그럼 앞으로도 직위는 없어도 되는가
앞으로는 직위를 넣을 것인가
이번 분부터 넣을 것인가
다음 분부터 넣을 것인가
며칠 시점의 데이터를 쓸 것인가
며칠까지 필요한가

그런데 문제 해결에 서툰 직장에서는 여기서 이야기가 엇나간다.

왜 안 들어 있었나
누가 빠뜨렸나
담당자 실수인가
다른 부서의 지적이 맞는 건가
전임자는 어떻게 했나

이렇게 되면 과거 확인이 '앞으로의 운영을 정하는 재료'가 아니라 '누군가를 탓하는 재료'가 되어 버린다.

이건 아무 소득이 없다.

추가 요청이 나왔다면 "그럼 넣을게요"로 끝날 일이다

일을 하다 보면 나중에야 필요한 항목을 알게 되기도 한다.

흔한 일이다.

다른 부서가 실제로 명부를 써 보니

직위가 없으면 알아보기 힘들다
소속만으로는 판단이 안 된다
16일 발행분에 쓰려면 좀 더 최근 데이터가 필요하다

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써 보고 필요한 항목이 보였다면 업무를 개선할 기회다.

원래 답변은 이러면 된다.

아, 앞으로는 직위도 필요하시군요.
그럼 다음 회차부터 항목에 추가하겠습니다.

필요하면 이렇게 이어간다.

이번 분에도 필요하시면 직위를 넣어서 다시 만들겠습니다.
16일 발행분에 쓰시는 경우, 필요한 날짜와 기준일을 확인하겠습니다.

이러면 일이 진행된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잘못했나'를 섞는 순간 갑자기 이상해진다.

그럼 지금까지 틀렸다는 거야?
지적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거야?
담당자 실수일 수도 있어
대충 답하면 혼나

아니다.

추가 요청이 나왔다.
그러면 추가한다.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러면 정한다.

그뿐이다.

'혼나기 싫다'가 목적이 되면 업무는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골치 아픈 건 상사나 담당자의 목적이 어긋난다는 점이다.

본래 목적은

상대 부서가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항목이 들어간 데이터를 받게 하는 것

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목적이 이렇게 바뀌기도 한다.

내가 혼나지 않도록 답변할 재료를 모으고 싶다

이 목적의 어긋남이 현장의 부담을 키운다.

'상대 부서가 무엇을 언제 원하는지'만 확인하면 이야기는 빠르다.

직위는 필요하신가요
며칠 시점의 데이터가 필요하신가요
며칠까지 보내면 될까요
이번 분부터 필요하신가요, 다음 분부터 괜찮으신가요

이걸 물으면 거의 끝난다.

하지만 '혼나기 싫다'가 목적이 되면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게 된다.

4월과 5월엔 어땠나
누구 실수인가
어떻게 답해야 탓을 안 듣나
다른 부서에 대충 답했다가 혼나기 싫다

물론 대충 답하는 건 좋지 않다.
하지만 정확하게 답하는 데 필요한 건 범인 찾기가 아니다.

필요한 건

과거에는 이랬습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필요한 날짜와 기준일을 확인하겠습니다

라는 정리다.

'혼나기 싫다'를 중심에 두면 일이 방어 자세가 된다.
그러면 목적이 '상대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내가 탓을 듣지 않는 것'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게 현장을 지치게 한다.

실무자에게 얹히는 부담은 작업만이 아니다

이런 대화에서 깎이는 건 작업 시간만이 아니다.

실무자에게는 다음 부담이 한꺼번에 얹힌다.

  • 지난 자료를 확인하는 부담
  • 앞으로의 규칙을 생각하는 부담
  • 다른 부서의 요구를 정리하는 부담
  • "네 실수일 수도 있어"라는 의심을 받는 부담
  • 상사의 '혼나기 싫다'를 처리하는 부담
  • "빨리 해"라는 시간 압박을 받는 부담
  • 원래 확인해야 할 쟁점이 무시당하는 스트레스

그러니까 단순한 확인 작업이 아니다.

확인 작업 + 실수 의심 + 시간 압박 + 감정 처리 + 요건 정의

가 한꺼번에 던져지고 있는 것이다.

의욕이 깎이는 게 당연하다.

'4월 없음, 5월 없음'을 확인하는 것만이라면 5분이면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네 실수일 수도 있어", "나 혼나는 거 싫어", "빨리 해"가 얹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작업 자체보다 쓸데없는 압박에 멘탈이 깎여 나간다.

'현황 파악이 먼저'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물론 현황 파악은 중요하다.

과거에 직위가 들어 있었는지.
지금까지 월초에 제출했는지.
다른 부서는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이걸 확인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다만 현황 파악은 목표가 아니다.

현황 파악은 다음 판단으로 넘어가기 위한 재료다.

4월 없음
5월 없음
지금까지 직위 없이 운영
그럼 앞으로는 직위를 넣을 것인가
16일 발행분이라면 며칠 시점의 데이터가 필요한가
제출일은 언제로 할 것인가

여기까지 가야 비로소 일이 된다.

현황 파악만 하고

네 실수일 수도 있어
대충 답하면 혼나
일단 현황 파악이 먼저야
일정이나 기준일은 별개의 얘기고

에서 멈춘다면 그건 일이 아니라 방어다.

현황 파악은 책임을 찾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규칙을 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필요일'과 '기준일'을 묻지 않으면 상대의 목적을 채울 수 없다

상대 부서가 정말로 곤란해하는 건 아마 이런 점일 것이다.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항목이 들어간 데이터를 원한다

그렇다면 확인해야 할 건 분명하다.

1. 어떤 항목이 필요한가

직위가 필요한가.
소속만으로 충분한가.
사원번호나 입사일도 필요한가.

2. 며칠 시점의 데이터가 필요한가

월초 시점인가.
16일 발행 직전인가.
발행일 전 영업일인가.
인사 발령이 반영된 시점인가.

3. 며칠까지 필요한가

16일 발행분에 쓴다면 며칠 전까지 필요한가.
확인, 인쇄, 결재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이 세 가지를 묻지 않고 과거만 파헤쳐서는 상대의 목적을 채울 수 없다.

예를 들어 4월과 5월에 직위가 들어 있었는지 확인해도, 6월 이후에 직위가 필요한지는 정해지지 않는다.
과거에 없었더라도 앞으로 필요하면 넣으면 된다.
과거에 있었더라도 앞으로 필요 없으면 빼면 된다.

과거는 참고 자료일 뿐, 미래의 규칙 그 자체가 아니다.

정말 필요한 답변은 이 정도면 된다

이 상황에서 상대 부서에 답한다면 대체로 이 정도면 충분하다.

확인해 보니 4월, 5월 모두 직위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직위 없이 월초에 제출하는 방식으로 운영해 왔습니다.
앞으로 직위가 필요하시면 항목에 추가하겠습니다.
16일 발행분에 사용하실 경우, 며칠 시점의 데이터가 필요한지, 며칠까지 제출하면 되는지 알려 주세요.

이거면 충분하다.

이 문장에는 필요한 정보가 다 들어 있다.

  • 과거의 상태
  • 지금까지의 운영 방식
  • 앞으로의 대응
  • 상대에게 확인해야 할 쟁점

이렇게 보냈는데도

네 실수일 수도 있어
그건 별개의 얘기고
일단 현황 파악
빨리 해

라는 말이 돌아온다면, 이미 업무 정리가 아니라 상대의 불안을 달래 주는 일이 된 것이다.

거기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다.

직장에서 쓸 수 있는 짧은 템플릿

현황 확인만 요청받았을 때

확인했습니다.
4월, 5월 모두 직위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현황과 앞으로를 나눠서 말할 때

현재까지는 직위 없이 월초에 제출해 왔습니다.
앞으로 필요하시면 다음 회차부터 직위를 추가하겠습니다.

사용 시기를 확인할 때

16일 발행분으로 사용하실 경우, 며칠 시점의 데이터가 필요한지, 며칠까지 제출하면 되는지 확인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책임 추궁으로 흐를 것 같을 때

누가 잘못했다기보다는, 지금까지 직위를 필수 항목으로 하는 정의 자체가 없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표준으로 직위를 포함할지 정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상사가 재촉할 때

우선 현황은 4월, 5월 모두 직위 없음이었습니다.
앞으로의 운영은 필요 항목, 기준일, 제출일을 확인해서 정하는 형태가 되겠습니다.

핵심은 사실과 앞으로의 판단을 나누는 것이다.

과거: 4월 없음, 5월 없음
현재: 직위 없이 운영해 왔음
앞으로: 필요하면 넣는다
미정의: 필요일과 기준일

이렇게 하면 정리된다.

의욕이 사라지는 건 게을러서가 아니다

이런 대화를 하고 나면 의욕이 사라질 때가 있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실무자는 일을 안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거 확인
현황 정리
앞으로의 대응안
상대 부서에 확인할 사항
요건 정의 제안

까지 해냈다.

그런데도

네 실수일 수도 있어
혼나기 싫어
빨리 해
그건 별개의 얘기고

라는 말이 돌아온다.

이런 건 일을 앞으로 밀고 가려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깎인다.

올바른 해결 경로가 보이는데 상대가 '책임 캐내기'나 '혼나기 피하기'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의욕이 사라지는 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일을 앞으로 진행시키고 싶은 사람이 앞으로 가지 않는 대화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관리하는 쪽이 해야 할 일

관리하는 쪽에서 이 문제를 막고 싶다면 할 일은 어렵지 않다.

1. '이런 느낌으로'를 사양으로 만든다

샘플만 던지지 않는다.
필수 항목, 기준일, 제출일을 정한다.

2. 추가 요청을 책임 문제로 만들지 않는다

새 항목이 필요해졌다면 추가하면 된다.
과거의 실수 판정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3. 과거 확인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

과거를 파헤친다면 앞으로의 표준을 정하는 재료로 본다.
범인 찾기에 쓰지 않는다.

4. '혼나기 싫다'를 부하에게 흘려보내지 않는다

다른 부서에 혼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아래쪽 실무자에게 압박으로 넘기지 않는다.
관리하는 쪽의 불안은 관리하는 쪽에서 정리한다.

5. 필요일과 기준일을 묻는다

상대가 정말로 곤란한 건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정보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필요일과 기준일을 확인하는 게 최우선이다.

정리: 미정의를 발견했다면 탓하지 말고 정하라

4월 없음.
5월 없음.

이 확인으로 알 수 있는 건 과거의 운영 방식이다.

거기서 해야 할 일은

지금까지 직위 없이 운영했다
앞으로 필요하면 직위를 추가한다
16일 발행분에 쓴다면 필요일과 기준일을 확인한다

이것뿐이다.

그걸

누가 잘못했나
네 실수일 수도 있어
지적한 사람이 틀린 거야?
대충 답하면 혼나
빨리 해

로 바꿔 버리면 일은 순식간에 무의미해진다.

미정의를 발견했다면 탓하지 말고
정하라.

과거 확인은 범인을 찾기 위한 게 아니라 앞으로의 표준을 정하기 위해 쓴다.

필요한 건 큰 목소리도, 책임 캐내기도, 혼나기 피하기도 아니다.
필요 항목, 기준일, 제출일의 정의다.

'4월 없음, 5월 없음'으로 끝날 이야기를 막장 재판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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