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더 많이 베풀어 승진해도, 떠날 사람은 떠난다
어떤 회사에는 이런 분위기가 있다.
일단 베풀어라.
곤란한 사람을 도와라.
부탁받으면 맡아라.
많이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 리더다.
할 수 있으면 전부 해라.
겉으로 보면 아주 좋은 말처럼 들린다.
서로 돕기.
팀워크.
기여.
기버 정신.
직장인으로서의 성장.
좋은 말은 다 모아 놓은 셈이다.
하지만 실제 직장은 그렇게 아름답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실제로 능력이 높고 온갖 일을 흡수하던 사람이 회사를 떠나기도 한다. 승진한 사람도 떠난다. 거의 모든 일을 떠맡던 관리자도 비교적 짧은 기간 뒤 퇴사했고, IT에 강해 주변에서 무엇이든 물어보던 중견 직원도 결국 떠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승진했는가”가 아니다.
“그 승진으로 본인의 삶이 흑자가 되었는가”다.
승진해도 책임만 늘고, 신뢰를 받을수록 만능 잡역부가 되고, 도울수록 일이 끝없이 늘고, 가정과 취미까지 사라진 끝에 퇴사한다면 그 길을 성공 루트라고 부르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회사의 ‘전부 다 해라 OS’를 그대로 믿지 않고, 일을 어떤 기준으로 봐야 하는지 정리한다.
1. 기버는 강하다. 하지만 경계가 없는 기버는 탄다
다른 사람에게 주고, 돕고, 주변을 받쳐 주는 사람은 조직에서 큰 가치를 만든다.
막힌 동료를 돕는다.
지식을 공유한다.
빠진 일을 주워 담는다.
신입을 교육한다.
부서 사이의 틈을 메운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조직은 확실히 편해진다.
하지만 함정이 있다.
기버는 경계를 잃으면 소진된다.
Adam Grant와 Reb Rebele는 직장에서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이 가치 있는 반면, 경계 없이 계속 도우면 ‘generosity burnout’, 즉 베풂에서 오는 소진에 빠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계속 지원하다가 본인이 과부하 상태가 되면 결국 다른 사람을 도울 능력마저 떨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 직장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은 잘 아니까 물어보자.”
“친절하니까 부탁해 보자.”
“빠르니까 맡기자.”
정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저 사람은 뭐든 해 준다.”
“던져 놓으면 어떻게든 해 준다.”
“저 사람이 흡수하면 된다.”
“마무리는 저 사람이 해 주겠지.”
가 된다.
여기까지 오면 단순한 신뢰가 아니다.
사람을 인프라로 만들어 버린 상태다.
전기. 수도. Wi-Fi. 그리고 그 사람.
멈추면 모두가 곤란하니 늘 당연히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작 그 사람의 유지보수는 누구도 맡지 않는다.
2. ‘자산이 되는 기버’와 ‘소각되는 기버’는 다르다
구분해야 할 것은 기버냐 아니냐가 아니다.
그 베풂이 본인에게도 자산으로 돌아오는가다.
자산이 되는 기버
좋은 베풂은 다음과 같은 것을 남긴다.
- 전문성
- 경력
- 재량권과 의사결정 권한
- 보상
- 인맥
- 평판
- 재사용 가능한 시스템
- 다음 선택지
예를 들어 현장 개선을 한 뒤 표준서가 남는다. 신입 교육을 한 뒤 재사용 가능한 교육 흐름이 남는다. IT 대응을 한 뒤 자동화 도구나 운영 설계가 남는다. 부서 간 조정을 한 뒤 책임 범위와 업무 흐름이 명확해진다.
이런 베풂은 좋다. 상대에게도 남고, 나에게도 남는다.
소각되는 기버
반대로 소각되는 베풂은 이렇게 된다.
- 끼어드는 일이 늘어난다
- 잡무가 늘어난다
- 뒤처리가 늘어난다
- 주체가 불분명한 의뢰가 늘어난다
- 책임만 늘어난다
- 보상은 거의 늘지 않는다
- 경력으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 결국 지쳐서 떠난다
겉으로는 베푸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회사가 값싼 여유 용량으로 쓰고 있을 뿐일 수 있다.
“기버가 되면 승진한다”고 해도 그 승진이 무엇으로 바뀌는지 봐야 한다.
급여가 늘고
재량이 늘고
지원 인력이 생기고
자유가 늘고
경력이 강해지고
회사 밖에서도 통하고
가정과 취미가 남는다면
승진의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일만 늘고
책임만 늘고
뒤처리가 늘고
거절하기 어려워지고
집에 못 가고
취미가 사라지고
결국 퇴사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올라간 것이 아니다.
소각로의 더 높은 선반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3. 승진하고도 떠난다면 그 길이 자동으로 ‘성공 루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직장에서 자주 나오는 착각이 있다.
“저 사람은 승진했으니 저 방식이 맞다.”
“많이 짊어졌으니 훌륭하다.”
“무엇이든 했으니 본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결국 회사를 떠났다면 봐야 할 지점이 달라진다.
승진했는지만 보지 말고,
승진한 결과 그 사람의 삶이 더 좋아졌는가를 봐야 한다.
삶을 흑자로 만드는 승진이라면 보통 이런 것이 늘어난다.
- 보상
- 재량
- 지원 인력
- 일을 고르고 우선순위를 정할 권한
- 가정을 지킬 여유
- 회사 밖에서도 설명 가능한 경력
- 시장가치
- 인생의 선택지
반대로 적자가 되는 승진은 이렇게 보일 수 있다.
- 일만 늘어난다
- 판단 책임만 늘어난다
- 인원은 늘지 않는다
- 보상은 크게 늘지 않는다
- 아무도 주인이 아닌 일이 계속 모인다
- 쉬는 날에도 머리에서 일이 떠나지 않는다
- 가정과 취미가 줄어든다
- 결국 퇴사한다
이 결과를 보지 않고 “승진한 사람을 본받아라”라고만 하면 조언이 불완전하다.
그 길 끝에 퇴사가 있다면 그 사람은 롤모델이라기보다 내 미래의 샘플일 수 있다.
“아, 저 산은 내가 오를 산이 아니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4. 회사의 ‘전부 다 해라 OS’가 개인의 삶까지 흑자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일부 회사에는 사실상 이런 운영체제가 있다.
할 수 있으면 전부 해라.
부탁받으면 받아라.
곤란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라.
거절하지 마라.
일을 많이 흡수하는 사람이 훌륭하다.
많이 짊어지는 사람이 리더다.
이걸 그대로 믿으면 유능한 사람일수록 위험하다.
왜냐하면 일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 몰리기 때문이다.
처리가 빠르다.
IT를 이해한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정의되지 않은 요구를 스스로 보완한다.
분위기를 읽는다.
갈등을 만들지 않고 일을 앞으로 보낸다.
이런 사람에게는 곧
“이것도 부탁해.”
“하는 김에 이것도.”
“저 건도 봐 줘.”
“IT 쪽에 물어봐 줘.”
“주관 부서랑 조정해 줘.”
“자료도 만들어 줘.”
“신입도 봐 줘.”
가 쌓인다.
본인은 성장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미정의 업무를 흡수하고 있을 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을 하는 게 아니다.
내가 한 일이 무엇으로 바뀌는가가 중요하다.
5. 연구를 봐도 요구만 높고 자원이 부족한 일은 소진 위험이 커진다
직무 소진을 설명할 때 널리 쓰이는 틀 가운데 하나가 Job Demands–Resources model, 즉 JD-R 모델이다.
단순화하면 높은 직무 요구가 지속되는데 이를 감당할 자원이 부족하면 피로와 소진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관점이다.
직무 요구에는 업무량, 감정노동, 역할 모호성, 압박 등이 들어갈 수 있다. 직무 자원에는 자율성, 지원, 피드백, 보상, 성장 기회 등이 포함된다.
따라서 이런 상태는 경고 신호다.
일은 늘어난다.
재량은 늘지 않는다.
사람도 늘지 않는다.
보상도 늘지 않는다.
책임 범위는 여전히 모호하다.
감사는 잠깐이다.
그리고 다음 일이 온다.
Christina Maslach와 Michael Leiter의 소진 연구에서는 사람과 직장 사이의 불일치가 생길 수 있는 여섯 영역으로 업무량, 통제, 보상, 공동체, 공정성, 가치 등을 다룬다.
이를 ‘전부 다 해라 OS’에 대입하면 이해하기 쉽다.
| 영역 | ‘전부 다 해라 OS’에서 생길 수 있는 일 |
|---|---|
| 업무량 | 유능한 사람에게 일이 집중된다 |
| 통제 | 받을지 거절할지 결정할 재량이 약하다 |
| 보상 | 늘어난 일에 비해 보상이나 인정이 부족하다 |
| 공동체 | 상호 지원이 아니라 일방적 의존이 된다 |
| 공정성 | 일을 흡수하는 사람이 가장 큰 비용을 낸다 |
| 가치 | 자유·건강·가정 같은 개인의 우선순위가 밀려난다 |
결론은 “남을 돕지 말라”가 아니다.
요구는 계속 늘어나는데 이를 감당할 자원이 늘지 않는 구조에서는 도움 자체가 위험한 방식으로 설계될 수 있다는 뜻이다.
6. ‘신입 교육 때문에 초과근무 100시간’은 훈장이 아니라 설계 실패일 수 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신입을 교육하느라 초과근무를 100시간 했다.”
먼저 그 노력을 칭찬하고 싶어질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질문도 필요하다.
왜 한 사람을 교육하는 데 그만큼의 추가 노동이 필요했는가?
같은 설명을 매번 사람이 반복하고, 같은 실수를 하나씩 직접 고쳐 주고, 모든 작은 단계를 숙련자가 매번 확인해야 한다면 문제는 신입의 능력이나 교육 담당자의 헌신 부족이 아닐 수 있다.
교육 프로세스의 설계 자체가 나쁠 수 있다.
반복 설명을 자산으로 바꾸는 방법은 있다.
- 반복되는 설명을 영상이나 문서로 남긴다.
- 명확한 OK/NG 예시를 만든다.
- 자주 확인하는 항목을 체크리스트로 만든다.
- 학습자가 먼저 자기 점검을 하게 한다.
- 숙련자는 차이, 예외, 고차원 판단에 집중한다.
사람이 직접 가르치는 일을 없애자는 뜻이 아니다.
매번 반복되는 교육의 연료로 교육 담당자를 태우지 말자는 뜻이다.
조직이 “이 사람은 극단적인 초과근무도 버틴다”만 학습하면, 잘못된 프로세스를 고치는 대신 그 프로세스를 견딘 사람을 보상해 버릴 수 있다.
7. 무한 기버가 아니라 ‘자산화 기버’가 되자
지속 가능한 기버는 모든 부탁을 영원히 받아 주는 사람이 아니다.
더 나은 모델은 자산화 기버다.
예를 들면 이렇다.
- 조언은 하되 자동으로 영구 담당자가 되지는 않는다.
- 첫 템플릿은 만들되 자동으로 계속 운영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 방법을 가르친 뒤 주된 책임을 원래 담당자에게 돌려준다.
- 엉킨 프로세스를 정리하되 이후의 모든 예외를 조용히 떠안지 않는다.
- 문제를 돕는 동시에 똑같은 문제가 같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확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을 돕되 자기 삶 자체를 소모품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다.
판단 기준은 간단하다.
도운 뒤에 피로 말고 무엇이 남는가?
전문성, 재사용 가능한 시스템, 명확한 책임 구분, 강해진 경력 스토리, 더 큰 권한, 더 많은 선택지가 남는다면 그 노력은 누적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이제 더 많은 사람이 나에게 일을 던져도 된다는 걸 알게 됐다”만 남는다면 그 누적은 내 편이 아니다.
8. 일을 더 받기 전에 확인할 다섯 가지 질문
‘네’라고 말하기 전에 다음 다섯 필터를 통과시켜 보자.
1. 이 일이 내 직업적 가치를 높이는가?
구매, 개선, AI, VBA, 표준화, 제조 현장 이해처럼 내가 원하는 경력에 의미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가?
어려운 일도 내가 의도적으로 키우고 싶은 기술을 만든다면 할 가치가 있다.
2. 재사용 가능한 시스템이 남는가?
결과가 템플릿, 자동화, 표준, 체크리스트, 교육 자료, 데이터베이스, 문서화된 업무 흐름 같은 재사용 자산으로 남는가?
다음 달 똑같은 문제가 똑같은 형태로 다시 온다면 그 노력은 누적되지 않고 사라지고 있을 수 있다.
3. 내 자유와 선택지가 늘어나는가?
재량, 소득, 시장가치, 이동 가능성, 협상력, 미래 선택지를 늘려 주는가?
책임이 늘어난다고 자유가 자동으로 늘지는 않는다.
4. 책임이 명확한가?
최소한 다음은 확인하자.
- 주 담당자
- 의사결정자
- 기한
- 산출물
- 범위
이것들이 정의되지 않으면 유능한 사람은 노동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누락된 관리 구조까지 대신 만들어 주게 된다.
5. 전문성을 쌓는 신뢰인가, 만능 잡역부로서의 신뢰인가?
“무엇이든 해결하는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은 가치 있어 보인다.
하지만
“가치 있는 특정 분야에 강한 사람”
과
“아무도 맡고 싶지 않은 일을 받아 주는 사람”
은 다르다.
둘 다 시간을 요구받게 만든다. 하지만 후자가 반드시 직업적 위치를 강화해 주는 것은 아니다.
9. 승진은 수단이다. 목표는 선택지를 늘리는 것이다
승진이 나쁜 것은 아니다.
신뢰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남을 돕는 것도 나쁘지 않다.
책임을 맡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문제는 승진 그 자체를 최종 점수처럼 보는 것이다.
좋은 승진은 다음을 늘릴 수 있다.
- 급여
- 권한
- 재량
- 사람과 자원에 대한 접근
- 경력의 가치
- 협상력
- 미래의 선택지
이것들이 유용한 이유는 다음에 고를 수 있는 것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승진이 업무량과 책임만 늘리고 지원, 통제권, 보상, 개인 시간을 거의 바꾸지 못한다면 직함은 비싼 이름표가 될 수 있다.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이 조직 안에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가?”
가 아니다.
“여기서 올라가는 것이 내 삶에 대한 통제력을 더 늘려 주는가?”
다.
회사가 자랑하기에는 불편한 지표일 수 있지만 개인에게는 훨씬 유용하다.
10. 결론: 회사의 ‘전부 다 해라 OS’를 내 삶에 그대로 설치하지 말자
베풂은 유용하다.
도움도 유용하다.
신뢰도 유용하다.
승진도 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따로 떼어 최종 평가하면 안 된다.
더 좋은 질문은 내 노력이 무엇으로 축적되는가다.
일이 전문성, 재사용 가능한 시스템, 보상, 권한, 평판, 선택지를 만든다면 그 노력은 자산을 쌓고 있다.
반대로 끼어드는 일, 뒤처리, 정의되지 않은 책임, 피로만 만든다면 그 노력은 소모되고 있다.
그러므로 회사의 ‘전부 다 해라 OS’를 내 삶에 무작정 설치하지 말자.
대신 자산화 OS를 쓰자.
사람을 돕는다.
기여한다.
의미 있는 도전을 맡는다.
다만 그 결과가 조직에도, 나에게도 남게 한다.
가장 강한 기버는 영원히 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연료로 만들지 않고도 가치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참고 자료 (5건)
- Adam Grant & Reb Rebele, “Beat Generosity Burnout,” Harvard Business Review (2017): https://hbr.org/2017/01/beat-generosity-burnout
- Evangelia Demerouti, Arnold B. Bakker, Friedhelm Nachreiner & Wilmar B. Schaufeli, Job Demands–Resources model 관련 연구: https://pubmed.ncbi.nlm.nih.gov/11419809/
- Christina Maslach & Michael P. Leiter, 직장 영역과 소진 관련 연구: https://pubmed.ncbi.nlm.nih.gov/10621016/
- 소진 연구 리뷰: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4911781/
- Tang et al., “Role Overload and Work Performance” (2021):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8176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