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도 평가도 없는데 책임과 대응만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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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서 지치는 이유가 단순히 일이 많아서만은 아니다.

물론 바쁜 건 힘들다.
마감은 코앞이고, 사람은 모자라고, 할 일은 쌓여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친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사람을 갉아먹는 피로가 있다.

바로,

역할도 평가도 없는데 책임과 뒤처리만 떨어지는 상태

다.

정식 담당자가 아니다.
평가에도 안 들어간다.
권한도 없다.
판단해도 되는 자리도 아니다.
그런데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만 연락이 날아온다.

게다가 한 번 받아 주면, 어째서인지 다음부터는 "그 사람이라면 해 주겠지"로 굳어 버린다.

이건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조직의 구멍으로 빠져나간 일을, 마침 근처에 있던 사람이 붙잡아 오게 되는 상황이다.

나는 요즘 이걸 이렇게 부른다.

구멍 난 동물원

우리에 구멍이 뚫려 있다.
그 구멍으로 '일'이라는 동물이 탈출한다.
원래는 우리를 고쳐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근처에 있던 사람이 매번 잡으러 다닌다.

그리고 잘 잡는 사람일수록 일이 더 몰린다.


1. '비정당 과업'이라는 이름이 있다

직업 심리학에서는 이런 일을 **비정당 과업(illegitimate task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정당 과업이란 대충 말하면,

'이게 정말 내가 해야 하는 일인가?' 싶은 업무

를 말한다.

연구에서는 비정당 과업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종류 내용 현장에서 느끼는 감각
unreasonable tasks 자기 역할이나 업무 범위에서 벗어난 일 "내가 이걸 왜 해야 하지?"
unnecessary tasks 애초에 필요 없거나, 구조가 나빠서 생겨나는 일 "이 작업, 없앨 수 있지 않나?"

중요한 건 비정당 과업이 그냥 '귀찮은 일'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귀찮아도 내 역할이라고 납득되는 일이라면 그럭저럭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역할 밖이고, 평가도 못 받고, 권한도 없는 일을 떠안게 되면 사람은 "내 시간과 전문성이 가볍게 취급당하고 있다"고 느끼기 쉽다.

그래서 힘들다.

작업 자체보다, 거기에 담긴 메시지가 더 아프다.

당신의 시간은 함부로 써도 된다
당신의 전문성은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이 곤란해져도 조직은 신경 쓰지 않는다

이렇게 받아들여지니까 의욕이 깎여 나간다.


2. 오늘의 사례: 오후 인수인계가 갑자기 사라졌다

예를 들어 오늘 이런 일이 있었다.

신입 사원 입사 대응으로, 오전에는 우리 쪽에서 교육 커리큘럼을 짜서 진행하고 있었다.
오후부터는 현장 쪽에 넘기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인수인계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뿐이었다.
그 사람이 갑자기 회의에 들어가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날아온 말이,

"하루 동안 그쪽에서 좀 봐 줄 수 없어요?"

였다.

얼핏 보면 그냥 협조 요청 같다.

하지만 여기서 아무 생각 없이 받으면 위험하다.

원래 있어야 할 수용 체계의 구멍이, 우리 쪽의 하루 치 시간 구속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일정이 있다.
오전은 우리가 맡는다 쳐도, 오후는 현장에 넘기는 것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그걸 상대 쪽 회의 사정 때문에 갑자기 "하루 종일 봐 줘"로 바꾸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하다.

그래서 먼저 물었다.

"현장 리더는 누구예요?"

원래 받아 줘야 할 곳이 어디인지부터 확인한 것이다.

그다음 현장 리더와도 이야기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대응하는 건 최대 1~2시간.
나머지는 현장 쪽에서 봐 주세요.

라는 형태로 정리했다.

이건 단순한 '거절'이 아니다.

일을 던져 버린 게 아니라,
원래 책임 범위로 되돌려 놓았을 뿐이다.


3. 또 날아왔다: 키오스크 단말기 PC가 안 켜진다

같은 날 다른 건도 날아왔다.

키오스크 단말기인지 뭔지 하는 PC가 켜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회의라 못 가니까 대신 좀 처리해 줘"

라는 말이 왔다.

이것도 위험하다.

PC 고장은 손을 대는 순간 책임이 생기기 쉽다.
모르는데 만지게 되고,
고쳐지지 않고,
"누가 만졌어?"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어째서인지 가장 먼저 대응한 사람이 관계자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이건 거절했다.

"저는 잘 몰라서요. 담당 부서에 확인해 주세요."

이걸로 충분하다.

차갑게 대한 게 아니다.
관할 밖의 일을 관할로 돌려보냈을 뿐이다.


4. 구멍 난 동물원에서는 '잘 잡는 사람'에게 일이 몰린다

구멍 난 동물원에서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처리 능력이 높은 사람이다.

주변에서 이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 저 사람이면 빠르다
  • 저 사람이면 알고 있다
  • 저 사람이면 어떻게든 한다
  • 저 사람은 거절하지 않는다
  • 저 사람은 화내면서도 결국 한다

그 결과, 정식 담당자도 아닌데 일이 온다.

게다가 평가로 이어지기도 어렵다.

그건 '본래 업무'가 아니라 '협조', '겸사겸사', '덕분에 살았어요' 정도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여기가 가장 괴롭다.

권한 없음.
역할 없음.
평가 없음.
수당 없음.
그런데 책임과 뒤처리만 생긴다.

이건 적자 노동이다.


5. 영역전개 사쿠사쿠 팬더

그래서 필요한 것이 영역전개 사쿠사쿠 팬더(애니메이션 『주술회전』의 '영역전개'를 비튼 이름이고, '사쿠사쿠'는 일을 척척 쳐낸다는 뜻이다)다.

이름은 장난스럽다.
하지만 하는 일은 꽤 실무적이다.

사쿠사쿠 팬더란,

내 주변에 울타리를 쳐서, 구멍으로 도망쳐 온 일을 자동으로 붙잡지 않기 위한 기술

이다.

핵심은 감정적으로 거절하는 게 아니다.

"싫은데요."
"못 해요."
"왜 제가 해야 하는데요."

이런 식으로 말로 싸우면 이야기가 길어진다.
상대도 맞받아친다.
결국 설명하는 비용만 늘어난다.

그렇게 하지 말고, 울타리를 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저희 쪽에서는 판단할 수 없으니, 담당 부서에 확인 부탁드립니다.
원래 인수받을 곳을 확인한 뒤, 저희가 대응할 수 있는 범위는 1~2시간입니다.
교육의 중심은 오후 통합 연습으로 확보해 두었습니다.
빈 시간에만, 교육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정형 업무를 부탁드렸습니다.

이런 글이다.

이건 차가운 거절 문구가 아니다.
책임 범위를 분명히 하는 울타리다.


6. 울타리를 칠 때의 기본 규칙

사쿠사쿠 팬더의 기본은 다음 다섯 가지다.

1. 먼저 원래 담당자를 확인한다

바로 내가 받지 않는다.

원래 담당은 어느 분이세요?
현장 리더에게는 확인하셨나요?
담당 부서에 확인 부탁드립니다.

2. 내 대응 상한을 정한다

"조금만"이 가장 위험하다.
조금만 할 생각이었는데 반나절, 하루, 지속 업무가 된다.

저희가 대응할 수 있는 건 1~2시간까지입니다.

3. 관할 밖은 관할로 돌려보낸다

모르는 걸 건드리면 대응자로 휘말린다.

저희 쪽에서는 판단할 수 없으니, 담당 부서에 부탁드립니다.

4. 말로 싸우지 말고 채팅에 남긴다

말은 흘러가 버린다.
채팅은 남는다.

혹시 몰라서 전제 조건을 공유드립니다.

이 한 문장을 넣는 것만으로도 방어력이 올라간다.

5. '선의'를 '상시 업무'로 만들지 않는다

한 번 도와주는 건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게 다음부터 당연한 일이 된다면 울타리가 필요하다.

이번에만 대응하겠습니다. 다음부터는 담당 부서에서 대응 부탁드립니다.

7. '거절'이 아니라 '되돌린다'

여기서 중요한 건, 사쿠사쿠 팬더는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목표는,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올바른 자리로 되돌리는 것

이다.

현장의 일은 현장으로.
IT 고장은 담당 부서로.
교육 방침은 교육 계획으로.
판단이 필요한 건 권한자에게.
수용 체계의 미비는 받는 쪽에.

이렇게 되돌리기만 하면 된다.

거꾸로 말하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은 위험하다.

  • 누구 일인지 모르겠다
  • 누가 판단하는지 모르겠다
  • 누가 책임지는지 모르겠다
  • 누가 평가하는지 모르겠다
  • 그런데 나한테만 뒤처리가 온다

이런 상태가 되면 구멍 난 동물원이다.


8. 해결사가 되기 쉬운 사람일수록 울타리가 필요하다

해결사가 되기 쉬운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다.

  • 처리가 빠르다
  • 구조를 이해하는 속도가 빠르다
  • 다른 부서 이야기도 대충 알아듣는다
  • 사람이 곤란해하면 줍고 만다
  • 내가 하는 게 빠르다고 생각해 버린다
  • 거절하는 이유를 설명할 바에는 그냥 해 버린다

이런 사람은 조직에는 편리하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위험하다.

편리한 사람일수록 역할 밖의 일을 빨아들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빨아들인 일은 정식 평가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필요한 건 다정함을 버리는 게 아니다.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건,

선의로 줍기 전에 울타리를 치는 것

이다.


9. 정리: 역할, 평가, 책임, 대응을 세트로 본다

일을 맡을 때는 다음 네 가지를 보는 게 좋다.

관점 질문
역할 이건 내 담당인가?
평가 이걸 하면 평가나 성과로 이어지는가?
책임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지는가?
대응 상한 나는 어디까지 대응할 것인가?

이 네 가지가 갖춰져 있다면 맡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역할 없음, 평가 없음, 권한 없음.
그런데 책임과 뒤처리만 온다.

이런 상태라면 일단 멈추는 편이 좋다.

그 일은 당신의 일이 아니라, 구멍으로 도망쳐 나온 일일지도 모른다.

구멍 난 동물원에서는 매번 잡으러 다니는 사람이 가장 지친다.
그러니 우리를 고치든, 담당자에게 되돌리든, 하다못해 내 주변에 울타리라도 쳐 두자.

그것이 바로,

영역전개 사쿠사쿠 팬더

다.

일을 척척 처리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척척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해결사로 소모되어 쓰러지지 않기 위한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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