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직장 내 갈등은 '기억'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기자
회사에서 힘든 일을 겪으면 가장 먼저 남는 건 감정이다.
"너무 힘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서웠다."
"또 말이 바뀌었다."
"나한테만 책임을 떠넘기는 것 같다."
이런 감정은 소중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상담할 때는 감정만으로는 잘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다.
상담 창구, 상사, 인사팀, 노무 담당자, 외부 상담 기관에 이야기하려면 아래 내용을 정리해야 한다.
- 언제
- 어디서
- 누가
- 무슨 말을 했는지
-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 나는 무엇을 했는지
-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 예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는지
이때 도움이 되는 것이 직장 내 갈등 기록이다.
기록이란 단순히 "싫었다"라고 적는 게 아니다.
일어난 일을 시간순으로 늘어놓고, 실제로 들은 말, 내가 한 대응, 업무에 미친 영향,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을 따로따로 나눠서 남기는 것이다.
기록해 보면 내가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직장에서 추궁을 당하면 내 잘못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더 일찍 했어야 했나?"
"내가 이해를 못 한 건가?"
"보고하는 방식이 문제였나?"
"적극성이 부족했나?"
그런데 막상 기록해 보면 실제로는 꽤 많은 일을 했다는 게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느 직장의 사례를 일반화해 보면, 이런 대응이 남아 있었다.
- 미리 자료를 만들어 두었다
- 마감 전에 초안을 제출했다
- 주변 사람들에게 확인을 부탁했다
- 상사에게 지시를 구했다
- 수정 요청에 대응했다
- 대안을 제시했다
- 업무 범위와 판단 기준을 확인하려고 했다
- 말로만 하지 않고 채팅이나 문서로 남기려고 했다
- 기한을 맞추려고 주변의 지연까지 메웠다
이렇게 보면 문제는 단순히 "본인이 아무것도 안 했다"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구조가 보일 때가 있다.
본인은 대응하고 있었지만 판단 기준, 역할 분담, 어디까지 하면 OK인지, 책임 범위가 모호해서 뒤늦은 수정과 책임 전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기록해 보면 한 번의 불쾌한 말이 아니라 반복되는 구조가 보인다
딱 한 번 강하게 말한 것이라면 그것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때 바빴을 수도 있고, 말투가 어긋났을 수도 있고, 업무상 지도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록을 시간순으로 놓고 보면 한 번이 아니라 구조가 드러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패턴이다.
-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이면 "마음대로 하지 마"라고 한다
- 확인하면 "스스로 생각해"라고 한다
- 말로 설명하라고 하면서 채팅으로 남기려 하면 싫어한다
- 미리 안을 냈는데 나중에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라고 한다
- 사소한 부분을 계속 다시 내야 한다
- 처음 낸 안을 통째로 부정당한다
- 업무 범위가 나중에 넓어진다
- 권한은 없는데 결과 책임만 진다
- "주도적으로 하라"면서 주도적으로 낸 안은 뭉개 버린다
- 특정인에게 업무가 쏠리는 걸 줄이겠다면서 표준화에 필요한 시간도 담당자도 마련해 주지 않는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단순한 한마디가 아니라 직장 운영 방식의 구조로 보는 편이 나을 때가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런 구조를 **'주도성 더블 바인드'**라고 부른다.
즉,
주도성을 요구하면서도 주도성이 나올 조건은 만들어 주지 않는다.
생각해서 움직이면 짓밟히고, 확인하면 주도성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런 구조는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풀기 어렵다.
기록해 보면 문제를 유형별로 나눌 수 있다
감정만 있으면 "싫었다", "힘들었다"로 끝나기 쉽다.
하지만 기록해 두면 문제를 분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분류다.
- 인격 부정
- 사람들 앞에서의 공개 질책
- 위압적인 말투
- 과도한 요구
- 뒤늦은 지시
- 책임 전가
- 판단 기준이 불분명함
- 권한 없이 책임만 떠넘김
- 상담하기 어려운 분위기
- 기록을 남기기 어렵게 말로만 하라고 강요함
- 끝없이 이어지는 재작업
- 주도성 더블 바인드
- 한 사람만 아는 업무를 떠안게 됨
- 개선 제안은 뭉개 놓고 "개선이 없다"고 말하는 구조
분류해 두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가 쉬워진다.
"상사가 싫어요"가 아니라,
지시 기준이 분명하지 않은 채 뒤늦은 수정이 계속되고, 상담이나 확인을 해도 '주도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서 업무를 하는 데 정신적 부담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정의를 참고하자
일본에서는 후생노동성(노동 문제를 관할하는 정부 부처)이 직장 내 괴롭힘(파워하라)의 요소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 우월적인 관계를 배경으로 한 언행
- 업무상 필요하고 적절한 범위를 넘은 것
- 근로자의 근무 환경이 해를 입는 것
또 대표적인 유형으로 신체적 공격, 정신적 공격, 인간관계에서의 배제, 과도한 요구, 과소한 요구, 사생활 침해 등이 제시되어 있다.
다만 개별 사건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는 결국 상황 전체를 보고 판단한다.
그래서 글이나 기록에는 "이건 틀림없는 괴롭힘이다"라고 단정하기보다,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수 있는지 상담하기 위한 사실 정리
로 남기는 편이 안전하다.
기록해서 좋았던 점
직장 내 갈등을 기록하면 이런 효과가 있다.
1.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남길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한 말과 순서가 흐릿해진다.
기록해 두면 나중에 다시 볼 수 있다.
2. 내가 한 대응도 남는다
상대의 말뿐 아니라 내가 무엇을 했는지도 남길 수 있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 했다", "보고하지 않았다"고 보일 위험을 줄일 수 있다.
3. 뒤늦은 지시가 보인다
시간순으로 놓고 보면 나중에 조건이 바뀐 건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건지 보인다.
4. 계속되고 있는지 보인다
일회성인지 반복인지 알 수 있다.
5. 상담하기가 쉬워진다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 감정이 아니라 자료로 내놓을 수 있다.
6. 내 생각도 정리된다
"내가 잘못인가, 상대가 잘못인가"가 아니라,
- 여기는 내가 고칠 부분
- 여기는 상대의 말투 문제
- 여기는 회사 시스템의 문제
- 여기는 판단 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았던 문제
이렇게 나눠서 볼 수 있다.
마무리: 기록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것
직장 내 갈등을 기록하는 목적은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목적은 내 상태와 일어난 일을 정확히 남겨서 다른 사람에게 상담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힘들었던 기억은 소중하다.
다만 기억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니까
- 실제로 들은 말
- 시간순
- 내가 한 대응
- 업무에 미친 영향
- 무엇이 문제가 될 수 있는지
-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
를 남기자.
기록한다고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정리할 수 있다.
직장 내 갈등을 기억만으로 끌어안지 말자.
기록으로 남기고,
시간순으로 정리하고,
내가 한 대응도 남기고,
구조를 보자.
필요하면 상담하자.
이것이 나를 지키는 첫걸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