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이런 일, 한 번쯤 겪어 봤을 것이다.
마침 근처에 있었다. 손님을 응대했다. 택배를 잠깐 받아 뒀다. 담당자가 자리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딱 한 번만 처리했다.
그런데 그 뒤로 이상하게 계속 나한테 연락이 온다.
"아직 짐이 그대로 놓여 있는데요." "이거 좀 챙겨 주실 수 있어요?" "담당자한테 연락 좀 해 주세요." "잠깐만 확인해 주실래요?"
아니, 잠깐만 기다려 달라.
나는 잠깐 받아 둔 것뿐이다. 정식 담당자가 아니다. 보관 담당도 아니다. 운반 담당도 아니다. 뒤처리 책임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한 번의 선의가 어느새 책임으로 바뀌어 있다.
이 글에서는 이 현상을 선의 세탁이라고 부르려 한다.
선의 세탁이란 무엇일까
선의 세탁이란 호의, 임시 대응, 그 자리에서 해 준 도움이 어느새 정식 책임이나 계속되는 업무로 바뀌어 버리는 현상이다.
구조는 이렇다.
원래 담당자, 둘 곳, 가져가는 규칙이 애매하다
↓
마침 근처에 있던 사람이 임시로 처리한다
↓
주변에서 "이 사람이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다른 부서에서도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 온다
↓
임시로 도와준 사람이 뒤처리 담당이 된다
처음에는 아주 사소하다.
택배를 받는다. 메일을 한 통 보낸다. 담당자에게 말을 건넨다. 누군가를 대신해 잠깐 확인해 준다.
하지만 어떤 직장에서는 그 작은 호의가 "이 사람한테 부탁하면 되겠네"로 바뀐다.
이것이 선의 세탁이다.
왜 나만 이럴까
나한테만 부탁이 몰리는 이유는 능력이나 착한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있다.
1. 역할이 애매하니까
원래 택배나 손님 응대에는 담당자, 둘 곳, 가져갈 곳, 기한, 담당자가 없을 때의 대응이 정해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애매하면 근처에 있던 사람이 빨려 들어간다.
누가 담당인지 모른다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른다
언제까지 둬도 되는지 모른다
누가 가지러 올지 모른다
담당자가 없을 때 누가 연락할지 모른다
이런 상태에서는 시스템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의 선의로 일이 돌아간다.
그리고 선의를 베푼 사람이 다음 책임자가 된다.
역할이 모호한 직장일수록 책임이 사람에게 달라붙기 쉽다.
2. 한 번 대응한 사람이 "아는 사람"으로 취급되니까
사람들은 한 번 대응한 사람을 "그 일을 아는 사람"으로 보기 쉽다.
언뜻 합리적인 생각이다. 실제로 그 사람은 상황을 알고 있다.
문제는 "아는 사람"과 "담당자"가 뒤섞이는 데 있다.
아는 사람
=상황을 한 번 본 사람
담당자
=책임지고 끝날 때까지 관리하는 사람
이 둘은 다르다.
그런데 직장에서는 곧잘 섞인다.
한 번 물건을 받은 사람. 한 번 메일을 보낸 사람. 한 번 확인한 사람. 한 번 설명한 사람.
이런 사람들은 "아는 사람"이 되고, 그대로 "해 주는 사람"이 되기 쉽다.
3. 부탁하기 편한 사람에게 몰리니까
직장의 잡무나 구멍 메우기는 정식 담당자가 아니라 부탁하기 편한 사람에게 흘러가기 쉽다.
부탁하기 쉬운 사람. 거절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 설명을 잘해 주는 사람. 일이 빠른 사람. 감정적으로 폭발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어떻게든 처리해 주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작은 뒤처리가 모여든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처리 능력이 높아서 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처리할 수 있는 일과 맡아야 하는 일은 다르다.
4. 선의가 '자발적 협력'이 아니라 '의무'가 되니까
직장에는 정식 업무는 아니지만 조직이 매끄럽게 돌아가게 하는 협력 행동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 잠깐 도와주기
-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 주기
- 정보를 공유하기
- 곤란해하는 사람을 돕기
- 그 자리에서 뒤처리해 주기
이런 행동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것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되었을 때다.
자발적 협력이 암묵적 의무가 된다. 선의가 평가나 분위기로 강요된다. 한 번 도와주면 다음에도 당연하다는 듯 부탁받는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왜 나만?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나만'은 감정이 아니라 구조로 봐야 한다
나한테만 부탁이 몰리면 무심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약해서 그런가?
내가 거절을 못해서 그런가?
내가 너무 착해서 그런가?
내가 만만해 보여서 그런가?
물론 조금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의 성격만 보고 판단하면 위험하다.
본질은 업무 설계의 문제다.
담당이 애매하다
책임 범위가 애매하다
임시 대응과 영구적인 책임이 구분되지 않는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부탁하기 쉬운 사람에게 떠넘기는 문화가 있다
선의를 시스템처럼 거둬들이고 있다
이런 구조가 있으면 누군가는 반드시 빨려 들어간다.
그 누군가가 마침 나인 것뿐이다.
그래서 대책은 "더 차가워지는 것"이 아니라 임시 대응이 영구적인 책임으로 바뀌지 않게 하는 것이다.
피하는 기본기: 임시 대응이라는 점을 맨 처음에 적는다
선의 세탁을 막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첫 문장이다.
임시로 대응했을 때는 이렇게 쓴다.
○○ 앞으로 온 택배를 임시로 수령했습니다.
담당 부서에서 수령 및 이후 처리를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임시로라는 말이다.
이 말만 넣어도 이런 경계선이 생긴다.
저는 정식 담당자가 아닙니다
저는 계속 관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잠깐 받아 둔 것뿐입니다
보관할 곳이 없거나 옮기기 어려우면 분명하게 적는다.
둘 곳이 없어 이쪽에서는 보관과 운반이 어려우니, 담당 부서에서 빨리 가져가 주시기 바랍니다.
꽤 좋은 문장이다.
왜냐하면 이런 내용이 전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둘 곳이 없어
→ 객관적인 제약
이쪽에서는 보관과 운반이 어려우니
→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분명히 함
담당 부서에서
→ 원래 책임져야 할 곳으로 돌려보냄
빨리 가져가 주시기 바랍니다
→ 필요한 행동을 구체적으로 밝힘
감정이 아니라 업무상의 제약으로 답하고 있다.
이것이 단호하면서도 예의 바른 경계선이다.
'갖다주기'는 하지 않는다
여기가 중요하다.
임시로 받은 짐을 내가 직접 담당 부서에 갖다준다. 이렇게 하면 선의 세탁이 성립하기 쉽다.
임시로 받는다
↓
직접 옮긴다
↓
다음에도 "받아서 갖다주는 사람"이 된다
위험하다.
물론 정말 급하고, 분명하게 부탁받았고, 업무상 필요하고, 부담도 작다면 예외는 있다.
하지만 기본 원칙은 이렇다.
임시로 받기는 했다
보관은 하지 않는다
운반은 하지 않는다
담당 부서가 가지러 온다
이것이 이치에 맞다.
'갖다주기'는 친절해 보인다. 하지만 직장에 따라서는 다음번부터의 전례가 된다.
그래서 거절할 때는 이렇게 말하면 된다.
이쪽에서는 보관과 운반이 어려우니, 담당 부서에서 가져가 주시기 바랍니다.
더 짧게 하려면 이렇게.
이쪽에서는 옮겨 드리기 어렵습니다. 가져가 주세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참조(CC)를 넣어서 기록으로 남긴다
선의 세탁을 막으려면 참조(CC)가 강력하다.
말로만 하면 이렇게 되기 쉽다.
누가 부탁했는지 모른다
누가 알고 있는지 모른다
누가 대응해야 하는지 애매하다
그래서 관련된 사람을 참조(메일에서 같은 내용을 함께 받아 보게 하는 수신란)에 넣는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게 된다.
짐이 남아 있다는 사실
둘 곳이 없다는 사실
담당 부서에 가져가 달라고 요청한 사실
다른 부서에서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는 사실
내가 보관과 운반을 할 수 없다고 밝힌 사실
이건 공격이 아니다.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선의 세탁은 애매한 곳에서 일어난다. 그러니 애매함을 줄이면 된다.
피하기 위한 문구 모음
임시로 수령했을 때
○○ 앞으로 온 택배를 임시로 수령했습니다.
담당 부서에서 수령 및 이후 처리를 부탁드립니다.
둘 곳이 없을 때
둘 곳이 없어 이쪽에서는 보관과 운반이 어려우니, 담당 부서에서 빨리 가져가 주시기 바랍니다.
갖다 달라는 말이 나올 것 같을 때
이쪽에서는 옮겨 드리기 어렵습니다. 가져가 주세요.
처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담당 부서에 메일로 연락하겠습니다.
이후 처리는 담당 부서에서 부탁드립니다.
내가 계속 떠안게 될 것 같을 때
임시 대응으로 연락해 두었습니다.
이후 관리와 처리는 담당 부서에서 부탁드립니다.
얼굴 붉히지 않고 돌려보내고 싶을 때
이쪽에서는 보관할 장소를 마련하기 어려워, 담당 부서에서 가져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대답
반대로 이런 대답은 위험하다.
일단 여기 놔둘게요.
나중에 볼게요.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시간 나면 갖다 드릴게요.
확인해 볼게요.
다정한 말이다. 하지만 애매하다.
애매한 다정함은 선의 세탁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일단", "나중에", "어떻게든", "볼게요" 같은 말은 책임 범위가 넓어지기 쉽다.
쓴다면 반드시 범위를 좁혀야 한다.
임시로 두긴 했지만 보관은 어렵습니다.
오늘 중으로 가져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한과 담당을 넣는다.
'그 뒤는 몰라'가 중요하다
경계선을 그은 뒤에 중요한 것은 확인하러 가지 않는 것이다.
메일을 보냈다. 참조도 넣었다. 담당 부서로 돌려보냈다. 보관과 운반은 못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여기까지 했다면 일단 끝난 것이다.
여기서
가져갔으려나?
아직 남아 있을까?
괜찮으려나?
한 번 더 말하는 게 좋을까?
하고 확인하러 가면 내 안에서 다시 담당자가 되는 일이 시작된다.
물론 업무상 위험이나 분실, 피해가 생길 게 분명하다면 다시 연락해야 한다. 하지만 기본은 "그 뒤는 담당 부서의 책임"이다.
속으로는 이 정도면 된다.
임시로 받기는 했다.
계속 관리하는 사람은 되지 않는다.
보관도 하지 않는다.
운반도 하지 않는다.
담당 부서로 돌려보냈다.
그 뒤는 몰라.
이 '그 뒤는 몰라'는 무책임한 게 아니다.
책임 범위를 나누고 있을 뿐이다.
정리: '나만'을 피하려면 처음에 경계선을 적는다
나한테만 부탁이 몰리는 건 성격만의 문제가 아니다.
역할이 애매하다. 담당이 애매하다. 책임 범위가 애매하다. 임시 대응과 영구적인 책임이 뒤섞인다. 부탁하기 편한 사람에게 몰린다. 선의가 의무가 된다.
이런 구조가 있기 때문에 나만 이렇게 된다.
그래서 해결책은 단순하다.
임시 대응이라고 분명히 적는다
보관과 운반이 안 된다고 분명히 적는다
담당 부서로 돌려보낸다
참조(CC)로 기록을 남긴다
기한을 넣는다
보낸 뒤에는 계속 끌어안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꽤 달라진다.
직장에서 친절한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선의가 영구적인 책임으로 바뀔 필요는 없다.
임시 대응은 임시 대응. 담당은 담당. 보관은 보관. 운반은 운반. 책임은 책임.
이걸 구분하자.
마지막으로, 이번 같은 상황에서 가장 쓰기 좋은 문장은 이것이다.
둘 곳이 없어 이쪽에서는 보관과 운반이 어려우니, 담당 부서에서 빨리 가져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공격이 아니다. 차가운 것도 아니다. 업무상의 경계선이다.
선의 세탁을 멈추려면 이런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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