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를 꺼내지 못하는 것과 대화를 못하는 것을 나눠 생각하기
갑자기 “뭐라도 얘기해 봐”라는 말을 들으면 난감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들 앞에서 대본을 읽는 것도 버겁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나는 상황에 맞게 바로바로 말하는 데 서툴구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상대가 무언가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궁금한 부분을 물어볼 수 있다. 설명을 들으며 익숙한 예로 바꿔 생각할 수도 있다. 눈길이 가는 말이 있으면 거기서 이야기를 넓힐 수 있다. 이런 순간도 있다면, “화제를 만들어 내는 일”과 “상대가 꺼낸 이야기를 받아 주는 일”을 나눠 생각해 보면 좋겠다.
끊임없이 화제를 꺼내는 것만이 대화 능력은 아니다. 상대의 한마디에서 다음 이야기로 이어질 작은 계기를 찾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이 글에서는 그 계기를 대화의 “실마리”라고 부르겠다.
“나는 실마리를 잡는 쪽이 말하기 편하다”는 관점도 자신에게 맞는 출발점을 찾는 단서가 된다. 말하기가 얼마나 편한지는 자리나 상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같은 영화를 여덟 번 봤어”라는 말에서 대화는 이미 시작된다
이 차이를 생각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같은 영화를 여덟 번 봤다”는 사람과 나눈 대화였다. “대단하다”, “정말 좋아하나 보다”라고 답해도 괜찮다. 하지만 조금 더 알고 싶다면 그 “여덟 번”을 실마리로 삼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 어떤 점 때문에 자꾸 보고 싶어져?
- 볼 때마다 눈여겨보는 부분이 달라?
- 특전으로 주는 굿즈도 즐거움 중 하나야?
- 좋아하는 등장인물을 응원하는 느낌이야?
- 처음 봤을 때와 지금, 인상이 달라진 부분도 있어?
이 질문을 전부 연달아 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정말 궁금한 것 하나를 골라 묻고, 돌아오는 이야기를 듣는다. “여덟 번”이라는 숫자에서 상대가 무엇을 즐기는지로 이어지는 대화다.
그 사람은 등장인물마다 시점을 바꿔 가면서 본다고 했다. 그래서 “배구는 몇 명이 하더라?”라고 물었더니 “여섯 명”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럼 여덟 번 중 남은 두 번은 뭐야? 선생님?”
나는 그 작품을 보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여덟 번 본다”, “시점을 바꾼다”, “배구는 여섯 명이다”라는 조합에서 살짝 비튼 말이 나왔다. 미리 화제를 준비해 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자리에서 함께 만든 대화였다.
물론 여섯 명은 6인제 배구에서 한 팀이 코트에 내보내는 선수 수이지, 등장인물이나 시점의 수에 상한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계산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게 아니라 서로 웃어넘길 수 있는 사이에서 하는 가벼운 농담이다. 농담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면 “누구의 시점으로 봤을 때 가장 재미있었어?”라고 솔직하게 묻기만 해도 좋다.
상대를 분석할 자료보다 “더 듣고 싶은 부분”을 찾기
대화의 실마리는 숫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번”, “처음”, “생각보다”, “의외로” 같은 표현이나 상대가 조금 신나서 말한 부분에도 있다.
“처음으로 혼자 여행했어”라는 말에는 “혼자 가니까 어떤 점이 달랐어?”라고 물을 수 있다. “생각보다 게임이 어려웠어”라는 말에는 “조작이 어려웠어? 아니면 작전을 짜는 게?”라고 물을 수 있다. 상대의 말을 받아서 알고 싶은 점 하나를 덧붙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계속 던져 상대를 샅샅이 알아내는 일이 아니다. 답변을 받아 주고 자신의 짧은 감상도 돌려준다. “같은 장면도 다르게 보이는구나. 나도 다시 보고 싶어졌어” 같은 한마디가 있으면 질문만 이어지는 시간이 되지 않기 쉽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데 감상을 꾸며 낼 필요는 없다. 상대가 말하고 싶지 않아 보이면 더 캐묻지 말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거나 잠시 조용히 있어도 좋다. 상대만 늘 화제를 준비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는 않은지도 살펴보자.
말하지 않는 시간도 대화의 일부다
인터넷에는 주로 읽는 쪽으로 참여하는 “ROM”, 흔히 말하는 눈팅족도 있다. Nielsen Norman Group의 “90-9-1 법칙”은 읽는 사람이 많고 소수가 많은 글을 올린다는 온라인 참여량의 편중을 설명하는 대략적인 기준이다. 정확한 비율이나 대면 대화 능력을 나타내는 숫자는 아니지만, 얼마나 많이 발신하느냐만으로 참여 방식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화에도 듣는 시간, 생각하는 시간, 말하는 시간이 있어도 좋다. 늘 화제를 꺼내는 사람도, 관심 있는 이야기에서 말이 많아지는 사람도, 들은 다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고정된 유형으로 나누기보다 그 자리와 상대에 맞춰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보고 싶다.
설명할 때는 상대가 아는 세계부터 물어보기
실마리를 잡는 능력은 잡담뿐 아니라 설명할 때도 쓸 수 있다. “어디까지 알고 계세요?”, “비슷한 경험이 있으세요?”라고 확인하고, 상대가 이미 아는 것을 발판으로 삼는다.
가령 같은 “일을 나누는 방법”을 설명해도 다음과 같은 출발점이 있다.
-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다면, 근무표는 누가 짜는지, 계산대에서 문제가 생기면 누구에게 확인하는지
- 동아리 경험이 있다면, 역할 분담이나 선배와 후배가 결정할 수 있는 범위의 차이
- 게임 경험이 있다면, 규칙, 이기기 위한 전략, 피해야 할 행동, 한정된 자원을 쓰는 방법
- 덕질 경험이 있다면, 모으고 싶은 물건의 우선순위, 교환, 다른 시점으로 보는 재미, 시간과 돈의 배분
학교, 직장, 가족, 쇼핑, 앱 사용법 등도 후보가 된다. 다만 나이나 겉모습만 보고 “이 사람은 게임을 알겠지”라고 단정하지 말고 상대에게 확인한다.
상대의 머릿속에 있는 선반을 찾아 새 정보를 올려 보는 것, 그런 이미지다. 선반은 비유일 뿐이며, 비유를 쓴다고 반드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일을 게임에 빗댄다면 “제한된 시간 안에 순서를 정하는 건 비슷하지만, 실제 업무에서는 안전 확인이나 승인을 생략할 수 없어요”라고 다른 점도 짚을 수 있다. “이 비유가 좀 와닿나요?”라고 묻고, 맞지 않으면 다른 예로 바꾸거나 원래 설명으로 돌아가면 된다.
여러 사람 앞에서도 듣는 사람의 경험으로 시작할 수 있다
교과서나 대본을 일방적으로 읽으면 반응을 보면서 이야기를 바꿀 여지가 적어 말하기 어렵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는 처음에 듣는 사람의 경험과 짧게 연결하는 방법이 있다.
“아르바이트나 동아리 활동 중에 누구에게 확인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던 적이 있나요?”
“이 설명을 자신의 업무에 대입한다면 어떤 상황과 비슷할까요?”
이런 질문으로 시작하고, 답이 나오면 본론으로 연결한다. 사람들 앞에서 답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머릿속으로만 생각해도 된다고 말해 줄 수 있다. 실패담이나 상사에 대한 불만, 가족 사정 등을 억지로 이야기하게 할 필요는 없다.
흐름을 만든다면 다음 다섯 단계를 한 가지 예로 삼을 수 있다.
- 듣는 사람이 쉽게 떠올릴 만한 경험을 묻는다
- 나온 경험의 공통점을 짧게 정리한다
- 오늘의 주제와 연결한다
- 그 상황에서 쓸 판단 기준을 전한다
- 마지막으로 듣는 사람의 현장에서 어떻게 쓸지로 돌아간다
예를 들어 “누구에게 확인해야 할지 몰라 일이 멈췄다”는 이야기에서 역할과 문의할 사람을 정리하는 내용으로 넘어간 뒤, 마지막에 “내일 이런 상황에 막히면 누구에게 확인하겠어요?”라고 돌아오는 것이다. 아무도 답하지 않으면 준비해 둔 가상의 예로 진행해도 된다. 반응을 얻어야만 성립하는 설명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Freeman 등의 2014년 메타분석은 대학 학부의 STEM, 즉 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 수업을 대상으로, 학습자가 활동에 참여하는 수업과 전통적인 강의식 수업을 비교했다. 평균적으로 전자에서 시험 성적이 높고 낙제율이 낮은 경향을 보고했다. 다만 수업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그대로 잡담이나 직장 내 설명의 효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소개한 다섯 단계나 농담의 활용법을 검증한 연구도 아니다.
대본을 버리기보다 남길 부분과 바꿀 부분을 나누기
상대의 반응을 받아 가며 말하는 쪽이 자연스럽더라도 대본이나 교과서가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전달해야 할 사항, 순서를 지켜야 할 절차, 정해진 시간 안에 설명해야 할 범위가 있다.
먼저 “반드시 전달할 핵심”을 정하고, 그 사이에 넣는 예나 질문은 바꿀 수 있도록 준비한다. 읽을 부분, 질문할 부분, 듣는 사람의 답변을 받을 부분을 나누면 대본과 대화를 결합하기 쉽다.
이야기가 다른 길로 새면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다루고 싶으니, 먼저 오늘의 핵심을 확인할게요”라며 돌아와도 좋다. 상대의 한마디를 잡는 것과 나온 화제를 모두 끝까지 따라가는 것 역시 별개의 일이다.
면접, 인수인계, 고객 응대, 도입 과정의 설명에서도 상대의 이해를 확인한다는 발상을 응용할 수 있다. 다만 상황마다 목적과 비밀 유지 의무를 지키고 필요한 설명을 빠뜨리지 않는다. “상대에게 익숙한 세계로 바꿔 설명했으니 이해했겠지”로 끝내지 말고, 무엇이 전달됐는지 확인하고 싶다.
자신에게 맞는 출발점 하나 찾기
아무것도 없는 데서 화제를 계속 만들어 내는 일은 어렵지만 상대의 말을 받아 주면 말하기가 편하다. 그렇게 알아차렸다면 대화를 시도할 때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 궁금해진 한마디를 잡는다. 모르는 부분을 묻는다. 익숙한 예가 맞을 것 같으면 쓰고, 다르면 바꾼다. 재미있는 조합이 보일 때는 상대도 즐거워할 것 같다면 가볍게 농담으로 답한다.
화제를 꺼내는 연습도, 짧게 설명하는 연습도, 듣는 연습도 할 수 있다. 서툴렀던 한 장면만으로 자신의 대화 능력 전체를 단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고민된다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만들어 내기 전에 상대가 아까 한 말 하나를 떠올려 보자. “그 얘기, 조금 더 들어도 될까?”라는 말에서 시작되는 대화도 있다.
- Nielsen Norman Group, “The 90-9-1 Rule for Participation Inequality in Social Media and Online Communities”. 온라인 참여량의 편중을 설명하는 글이다. 비율은 대략적인 기준이며, 대면 대화 능력이나 성격을 분류하는 데 쓰지 않는다. 글 읽기
- Freeman 등(2014), “Active learning increases student performance in science, engineering, and mathematics”. 대학 학부의 STEM 분야 수업을 대상으로 한 메타분석이다. 이 글의 대화 예시 자체의 효과를 보여 준 연구는 아니다. 논문 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