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연출 대출 먹튀'가 독자의 긴장감을 깨는 이유
예전부터 있던 배틀 만화에서 도저히 식어버리는 전개가 있다.
적은 쓰러진다.
적은 죽는다.
적 조직은 무너진다.
세계의 운명이 걸린 싸움이었을 텐데.
그런데 아군 쪽은 결국 거의 안 죽는다.
죽을 것 같은 연출은 있다.
희생처럼 보이는 연출도 있다.
동료가 운다.
배경음악도 무겁다.
독자도 "아, 이건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멀쩡하게 살아 있다.
이게 반복되면 꽤 많이 식는다.
"아군이 이기지 마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소년 만화에서 주인공 쪽이 이기는 건 좋다.
동료가 돌아오는 것도 좋다.
해피엔딩도 나쁠 건 없다.
문제는 죽을 수도 있다는 연출로 독자의 감정을 빌려 놓고, 나중에 아무 대가 없이 먹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면
'죽음 연출 대출 먹튀 만화'다.
싫은 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대가가 없는 것'
배틀 만화에서 아군이 이기는 건 기본적으로 당연하다.
주인공들은 이긴다.
세계를 구한다.
동료를 지킨다.
적을 쓰러뜨린다.
그 자체는 전혀 나쁘지 않다.
독자가 식는 건 승리 자체가 아니라, 승리에 대가가 없어 보이는 순간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 죽을 만한 공격을 맞았는데 다음 화에서는 멀쩡히 팔팔하다
- 누가 봐도 희생하는 연출이었는데 나중에 살아 돌아온다
- 동료가 대성통곡했는데 알고 보니 무사했다
- 나라나 마을이 쑥대밭이 될 뻔했는데 주요 아군은 거의 상처 하나 없다
- 적만 편하게 퇴장하고 아군은 보호받는다
이런 전개가 이어지면 독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차피 아군은 안 죽잖아"
이 순간 배틀의 긴장감은 확 떨어진다.
목숨을 건 싸움처럼 보이던 것이 갑자기 프로레슬링 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아니, 프로레슬링이면 프로레슬링대로 좋다.
하지만 그러려면 처음부터 "죽을지도 몰라"라는 표정은 짓지 말아 줬으면 한다.
원피스의 페르 문제: 아름다운 희생 연출의 먹튀
이 이야기에서 자주 예로 드는 게 『ONE PIECE(원피스)』의 페르다.
페르는 알라바스타 왕국의 호위대 부대장이고, '토리토리 열매 모델 팔콘(매)'의 능력자다. 공식 캐릭터 소개 페이지에도 바로크 워크스가 꾸민 궁전 앞 광장 폭파를 막았고 "목숨을 잃은 줄 알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고 적혀 있다.
즉 공식적으로도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살아 있었다"는 구조가 분명히 있는 셈이다.
문제는 페르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그 장면이 너무나 '희생의 완성형'으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나라를 지킨다.
폭탄을 끌어안는다.
하늘로 날아오른다.
폭발한다.
모두를 구한다.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 구도는 독자에게 "그는 자기 목숨과 맞바꿔 나라를 지켰다"고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무겁다.
그래서 아름답다.
하지만 나중에 살아 있다는 게 밝혀지면, 그 희생 연출의 무게가 일부 취소된다.
물론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느끼는 독자도 있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페르는 좋은 캐릭터고, 비비와 알라바스타 사람들에게도 소중한 존재다.
다만 이야기 구조로 보면 그 장면은 독자에게서 '죽음의 무게'를 빌려 갔다.
그리고 나중에 그 상환을 취소했다.
이게 '죽음 연출 대출 먹튀'로 보인다.
원피스가 전부 가벼운 건 아니다
다만 여기서 보정할 부분이 있다.
『ONE PIECE』는 죽음을 전혀 못 그리는 작품이 아니다.
에이스의 죽음.
흰수염의 죽음.
회상 속 벨메르, 히루루크, 톰, 로시난테 등의 죽음.
이것들은 매우 무겁고, 이야기에 강한 영향을 준다.
그러니 『ONE PIECE』 전체를 "아무도 안 죽는 가벼운 만화"라고 단정하는 건 엉성하다.
오히려 문제는 진짜 죽는 장면은 무거운데, 지금 진행 중인 전투에서는 가짜 죽음이 많아 보인다는 것이다.
진짜 죽음과 죽은 척 살아 있는 전개가 섞이면 독자의 '죽음 판정 센서'가 고장 난다.
"이거 진짜 죽은 건가?"
"어차피 또 살아 있는 거 아냐?"
"울리려고 하는데, 믿어도 되나?"
독자가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작가가 정말로 비극을 그려도 감정이 순순히 움직이지 않는다.
이게 가짜 죽음의 무서운 점이다.
페어리 테일은 '동료 전원이 함께 돌아온다'는 안정감이 강하다
『FAIRY TAIL(페어리 테일)』도 이런 이야기에서 자주 이름이 나오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동료, 길드, 유대, 가족 같은 분위기가 아주 강하다.
그래서 아군이 결국 돌아온다는 안정감이 있다.
그건 작품의 매력이기도 하다.
독자에 따라서는 바로 그 점이 좋다고 느낄 것이다.
"아무도 버리지 않는다"
"동료를 믿는다"
"마지막에는 다 같이 웃는다"
이 축제 같은 분위기는 『FAIRY TAIL』의 큰 가치다.
다만 긴장감이나 대가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이게 약점으로도 보인다.
"어차피 동료와의 유대로 돌아올 거잖아"
"어차피 안 죽잖아"
"어차피 마지막엔 전원 귀환이잖아"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리사나처럼 죽었다고 여겨진 캐릭터가 사실은 다른 세계 에드라스에 있었다는 전개도 그런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팬 데이터베이스에는 리사나가 처음엔 죽은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아니마에 의해 에드라스로 이동했던 것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 전개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구원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죽음으로 캐릭터나 관계가 달라졌다"고 받아들였던 독자에게는, 나중에 그 전제가 원상복구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슬픔의 의미가 옅어진다.
안 죽어도 된다. 하지만 대가는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캐릭터를 죽인다고 명작이 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무작정 죽이면 되는 게 아니다.
주요 캐릭터를 마구 죽이면 긴장감이 생긴다는 단순한 얘기도 아니다.
오히려 캐릭터를 아무렇게나 죽이면 그것대로 또 식는다.
중요한 건 죽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싸움에 대가가 있느냐 없느냐다.
안 죽어도 된다.
하지만 뭔가는 남았으면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 능력을 잃는다
- 한쪽 팔이나 한쪽 눈을 잃는다
- 꿈을 포기한다
- 관계가 무너진다
- 나라나 마을에 상처가 남는다
- 이기긴 했지만 목적을 완전히 이루지는 못한다
- 마음에 후유증이 남는다
- 다음 싸움에 영향을 주는 제약이 생긴다
- 구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 승리한 뒤에도 책임을 짊어진다
이런 대가가 있으면 캐릭터가 살아 있어도 싸움은 무거워진다.
반대로 아무도 안 죽는다.
아무도 망가지지 않는다.
관계도 원래대로 돌아온다.
능력도 돌아온다.
마을도 복구된다.
적만 퇴장한다.
아군은 다음 화에서 아무렇지 않게 개그를 하고 있다.
이러면 독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싸움, 정말 목숨 걸고 한 거 맞아?"
'아군 전용 자동 부활 보험'이 보이면 식는다
이야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규칙이 있다.
독자는 뚜렷이 의식하지 않아도 그 작품의 규칙을 점점 학습한다.
이 만화에서 주요 아군은 안 죽는다.
이 만화에서 적은 퇴장한다.
이 만화에서는 죽을 것 같은 연출을 해도 돌아온다.
이 만화에서는 동료와의 유대가 결국 전부 덮어쓴다.
이런 규칙이 너무 잘 보이면 전투 중의 위기가 소극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하면,
아군 진영만 자동 부활 보험에 가입한 상태
라는 것이다.
적은 보험 미가입.
아군은 죽음 연출 후에도 보상 있음.
주요 캐릭터는 다음 화 연재 보장 포함.
이 구조가 보이면 독자는 더 이상 순수하게 걱정할 수 없다.
"네네, 어차피 살아 있겠죠"
"네네, 동료의 힘으로 돌아오겠죠"
"네네, 적만 처리되겠죠"
이렇게 된다.
긴장감은 독자가 "정말로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기에 생긴다.
그런데 작품의 보호 규칙이 너무 잘 보이면 그 불안이 사라진다.
가짜 죽음이 나쁜 건 아니다
다만 가짜 죽음 자체가 절대적으로 나쁜 건 아니다.
쓰기에 따라서는 아주 재미있어진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 생존에 분명한 복선이 있다
- 살아 있던 이유가 납득이 된다
- 살아 돌아와도 큰 대가가 남는다
- 죽은 줄 알았던 기간에 인간관계가 변한다
- 복귀로 인해 이야기가 더 복잡해진다
- '살아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문제를 낳는다
이런 경우 가짜 죽음은 단순한 먹튀가 아니라 이야기의 장치가 된다.
즉 문제는 가짜 죽음이 아니다.
문제는,
죽음 연출로 독자를 울려 놓고, 살아 돌아온 뒤에는 거의 아무것도 치르지 않는 것
이다.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살아 있었을 때도 뭔가를 치러 줬으면 한다.
관계의 변화.
몸에 남은 상처.
마음의 후유증.
이야기상의 책임.
적과 아군의 상황 변화.
잃어버린 시간.
신뢰의 변화.
뭔가가 남으면 독자는 납득하기 쉽다.
옛날식 배틀 만화의 '전원 생환'은 안정감이자 약점이다
전통적인 소년 배틀 만화에는 "마지막엔 아군이 다 같이 돌아온다"는 좋은 점이 있다.
읽고 나면 기분이 좋다.
안심하고 읽을 수 있다.
캐릭터를 좋아해도 잃을 걱정이 적다.
아이들도 읽기 쉽다.
작품 전체가 밝아진다.
이런 방향성 자체는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그런 작풍으로 갈 거라면 죽음 연출을 너무 세게 쓰지 않는 편이 좋다.
처음부터 "이건 동료 전원이 함께 돌아오는 만화입니다"라는 작풍이라면 독자도 그러려니 하고 읽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적다.
그런데,
"이건 죽었다"
"이건 희생이다"
"이건 돌이킬 수 없다"
"이건 목숨을 건 최종 국면이다"
라는 연출을 여러 번 써 놓고 결과적으로 전원 생환을 되풀이하면, 독자는 감정을 가지고 놀림당했다고 느낀다.
안심감과 긴장감을 둘 다 최대치로 챙기기는 어렵다.
'아무도 안 죽는 안심감'을 택한다면 죽는다 죽는다 하는 낚시는 줄이는 편이 좋다.
'목숨을 건 긴장감'을 내고 싶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 편이 좋다.
독자가 싫어하는 건 작가에 대한 신뢰가 깎이기 때문이다
가짜 죽음이 이어지면 독자는 캐릭터뿐 아니라 작가의 연출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또 울리려는 것뿐 아냐?"
"어차피 다음 화에 살아 있겠지?"
"이 절망 연출, 믿어도 되나?"
"정말로 잃을 각오가 있는 걸까?"
이렇게 되면 독자는 이야기에 몰입하기 어려워진다.
원래 독자는 이야기 속에서 걱정하고 싶다.
화내고 싶다.
울고 싶다.
안심하고 싶다.
그런데 감정이 계속 헛스윙하게 되면 다음부터는 방어하기 시작한다.
"어차피 괜찮겠지"라고 생각해 버린다.
이건 이야기에 꽤 뼈아프다.
독자의 감정은 무한히 빌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한 번 빌렸으면 어떤 형태로든 갚아야 한다.
죽음 연출로 빌린 감정을 생환으로 계속 먹튀하면, 독자는 더 이상 빌려주지 않는다.
정리: 이기는 건 좋다. 하지만 대가를 먹튀하지 마라
배틀 만화에서 아군이 이기는 건 좋다.
동료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좋다.
해피엔딩도 좋다.
하지만 죽을 것 같은 연출로 독자의 감정을 빌렸다면, 어떤 대가든 치러 줬으면 한다.
안 죽어도 된다.
하지만 상처는 남았으면 한다.
관계는 변했으면 한다.
능력이나 꿈이나 책임에 영향이 있었으면 한다.
싸움이 끝난 뒤 "그 싸움은 정말 무거웠다"고 느끼게 해 줬으면 한다.
적만 죽는다.
아군은 울리는 연출만 하고 돌아온다.
다음 화에서는 멀쩡하다.
이게 계속되면 목숨을 건 싸움이 아니라, 아군 진영만 보험에 가입한 프로레슬링으로 보인다.
그러니 결론은 이거면 된다.
아군이 이기는 건 좋다. 하지만 죽음 연출 대출을 먹튀하지 마라. 독자의 감정을 빌렸다면 이야기상의 대가로 갚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