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자주 이런 장면이 나온다.
수컷들이 암컷을 두고 격렬하게 싸운다.
뿔을 부딪치고, 이빨을 드러내고, 몸으로 서로를 밀어붙인다.
그리고 이긴 수컷은 당당하게 암컷에게 다가가고, 진 수컷은 멀찍이 혼자 떨어져 풀이 죽은 듯 서 있다.
이 장면만 보면 자연에는 마치 이런 규칙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긴 수컷만 교미할 수 있다.
진 수컷은 깨끗하게 물러난다.
자연은 의외로 정직하고, 무사도 같은 규칙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암컷이 정말 누가 이겼는지 정확히 판정하고 있을까.
진 수컷이 이긴 수컷이 없는 틈을 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가가는 일은 없을까.
“내가 이겼다”는 표정으로 접근하면 의외로 통할 때도 있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자연은 그렇게까지 정직하지 않다.
“이긴 수컷이 교미할 수 있다”는 말은 수컷이 승패 결과를 암컷에게 제출하고 승인을 받는 제도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긴 수컷이 그 자리를 물리적으로 장악하고 다른 수컷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구조에 가깝다.
즉 자연은 승자 신고제가 아니다.
현장 장악제에 가깝다.
승패는 ‘증명서’가 아니라 ‘접근권’이다
수컷끼리의 싸움은 암컷에게 “제가 승자입니다”라고 증명하는 발표가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훨씬 단순하고 물리적이다.
강한 수컷이 그 자리에 있다.
다른 수컷이 다가오면 쫓아낸다.
진 수컷이 다시 접근하면 또 공격받을 수 있다.
그 결과 이긴 수컷이 암컷에게 접근할 기회를 독점하기 쉬워진다.
회사 인사평가 면담이라기보다 회의실 입구에 근육질 고릴라가 서 있는 상황에 가깝다.
“제가 이겼으니 교미할 권리를 주세요”가 아니다.
“가까이 오면 때린다”에 가깝다.
그래서 암컷이 승패를 세세하게 기록할 필요는 없다.
승자가 가까이 있고 패자를 쫓아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교미 기회는 승자 쪽으로 기울기 쉽다.
이런 의미에서 승패는 증명서가 아니라 접근권이다.
그렇다면 진 수컷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진 수컷이 영원히 깨끗하게 떠나는 것은 아니다.
동물 세계에는 정면 승부에서 이기기 어려운 수컷이 다른 경로로 번식 기회를 노리는 전략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배적인 수컷의 눈을 피해 몰래 교미하는 방식이다.
강한 수컷이 암컷을 지키고 있어도 항상 완벽하게 감시할 수는 없다.
다른 암컷을 쫓아갈 때도 있다.
잠을 잘 때도 있다.
시야가 끊길 때도 있다.
무리가 커지면 모든 개체를 관리하기도 어려워진다.
그 틈을 타 서열이 낮은 수컷이나 젊은 수컷이 몰래 접근한다.
정면 돌파가 아니라 닌자 전략이다.
동물행동학에서는 이렇게 정면 대결 말고 다른 방법으로 번식 기회를 얻는 방식을 ‘대안적 짝짓기 전술’ 또는 ‘대안적 번식 전술’이라고 한다.
수컷의 전략에는 암컷 가까이에 머물며 경쟁 수컷의 접근을 막는 ‘짝 지키기’뿐 아니라, 몰래 접근하는 방식이나 주변에서 기회를 기다리는 방식 등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야생 일본원숭이를 조사한 연구에서는 높은 서열의 수컷이 많은 교미를 차지하기 쉬운 한편, 낮은 서열의 수컷이 높은 서열의 수컷이 없는 곳에서 몰래 교미하는 행동도 관찰됐다. 암컷 역시 여러 서열의 수컷을 상대로 선택 행동을 보였다.
즉 자연은 “승자가 전부 가져간다”로 끝날 만큼 단순하지 않다.
승자 수컷은 정면 승부와 감시로 기회를 지킨다.
패자 수컷은 빈틈과 우회 전략으로 기회를 노린다.
암컷도 종과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여러 수컷과 교미하거나 특정 개체를 선택할 수 있다.
자연은 정직한 무사도가 아니다.
상당히 현장 중심의 수싸움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다큐멘터리에서는 왜 ‘패자가 풀이 죽은’ 것처럼 보일까?
여기가 재미있는 지점이다.
다큐멘터리에서 진 수컷이 혼자 멀리 물러나는 장면이 자주 보이는 데에는 대략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그 순간에는 실제로 물러나기 때문이다
우선 싸움에서 막 진 수컷이 물러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싸움으로 체력을 소모했다.
다쳤을 수도 있다.
승자가 아직 가까이 있다.
다시 접근하면 더 공격받을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다가가는 것은 번식 이전에 생존 비용부터 크다.
그래서 패배한 수컷이 그 자리에서 떨어지는 행동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풀이 죽었다기보다 일단 물러난 것이다.
사람 눈에는 “패배해서 낙담했다”처럼 보이지만, 동물행동으로 보면 “지금 가면 위험하니 거리를 둔다”에 더 가까울 수 있다.
2. 닌자 전략은 촬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몰래 교미하거나 빈틈을 노리는 행동은 촬영하기 어렵다.
다큐멘터리에서 찍기 쉬운 것은 거대한 수컷끼리의 싸움이다.
화면이 화려하고 소리도 크며 시청자가 이해하기 쉽다.
반면 몰래 교미하는 행동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짧은 시간 안에 끝날 수 있다.
풀숲이나 밤, 무리의 가장자리에서 벌어질 수도 있다.
촬영진이 그 순간을 정확히 따라가기는 어렵다.
게다가 나중에 유전자를 확인하지 않으면 실제로 어느 수컷의 새끼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즉 자연에는 ‘닌자 원숭이’가 있다.
다만 카메라에 잘 잡히지 않을 뿐이다.
3. 다큐멘터리는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로 편집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다큐멘터리의 이야기 구성 방식이다.
시청자가 바로 이해하기 쉬운 구도는 이런 것이다.
강자와 약자.
승자와 패자.
싸움과 결판.
왕좌와 추방.
고독한 패자.
이 구조는 사람이 보자마자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는 “이긴 수컷”과 “진 수컷”이라는 드라마를 만들기 쉽다.
물론 모든 것이 연출된 허구라는 뜻은 아니다.
영상은 실제로 촬영된 것이다.
싸움도 실제로 벌어진다.
진 개체가 떠나는 일도 실제로 있다.
다만 자연 전체의 모습은 훨씬 복잡하다.
몰래 교미.
짝 지키기.
암컷의 선택.
여러 수컷과의 교미.
여러 수컷의 정자가 수정 기회를 두고 경쟁하는 현상.
장기적인 관계.
무리 구조.
나이.
체격.
발정 시기.
이 복잡한 요소를 전부 넣으면 30초짜리 명장면으로 만들기 어렵다.
그래서 영상에서는 “승자와 패자”라는 단순한 이야기로 정리되기 쉽다.
동물이 ‘정직한’ 것이 아니라 ‘거짓말이 잘 통하지 않는 현장’에 있다
이제 처음의 의문으로 돌아가 보자.
진 수컷은 이긴 수컷이 없는 사이에 슬쩍 “내가 승자다”라는 얼굴로 다가가 교미할 수 없을까.
상황에 따라서는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몰래 교미하는 행동과 대안적 번식 전략이 존재한다.
하지만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서는 거짓 자기신고보다 현장의 조건이 더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승자가 가까이 있는가.
암컷이 받아들이는가.
무리의 다른 개체가 방해하지 않는가.
번식하기에 맞는 시기인가.
접근했을 때 공격받지 않는가.
자신의 체격과 나이로 통할 수 있는가.
이 조건들이 모두 얽힌다.
그래서 자연에서는 “내가 이겼다”는 가짜 이력서가 잘 통하지 않는다.
바로 옆에 진짜 승자가 있고, 가까이 가는 순간 얻어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이 정직한 것이 아니다.
거짓말이 잘 통하지 않도록 현장 조건이 짜여 있을 뿐이다.
자연은 무사도가 아니라 현장 장악 게임이다
다큐멘터리 속 자연은 가끔 지나치게 아름답게 보인다.
승자는 당당하게 이기고, 패자는 깨끗하게 떠난다.
강한 개체가 선택되고 약한 개체는 조용히 퇴장한다.
마치 자연에 정정당당한 규칙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훨씬 더 진흙탕에 가깝다.
승자는 지킨다.
패자는 빈틈을 노린다.
암컷은 선택한다.
무리의 다른 개체는 방해한다.
카메라는 찍기 쉬운 장면을 담는다.
편집은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로 정리한다.
그래서 패배한 수컷이 혼자 멀리 떨어져 풀이 죽은 듯 보이는 영상을 봐도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정확하다.
이 개체가 영원히 포기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이길 수 없으니 거리를 두는 것일 수 있다.
다른 시점에는 닌자 전략으로 기회를 노릴 수도 있다.
다만 그런 장면이 카메라에 잘 잡히지 않을 뿐일 수 있다.
자연은 무사도가 아니다.
현장 장악 게임이다.
승자 신고제가 아니다.
가까이 갈 수 있는가, 경쟁자를 쫓아낼 수 있는가, 암컷에게 받아들여지는가, 빈틈이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런 조건으로 돌아간다.
상당히 원숭이 회의 같다.
다만 인간의 원숭이 회의보다 규칙이 훨씬 물리적이고 알아보기 쉽다.
정리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패배한 수컷이 혼자 풀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순히 “자연이 정직해서”가 아니다.
실제로는 다음 요소가 겹쳐 있다.
- 막 패배한 뒤에는 다시 접근하면 위험하므로 실제로 물러난다
- 승자 수컷은 암컷에게 접근하는 기회를 물리적으로 지킨다
- 패자나 낮은 서열의 수컷이 빈틈을 보고 몰래 교미하는 경우도 있다
- 암컷도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며 선택하거나 여러 수컷과 교미할 수 있다
- 다큐멘터리는 화려한 싸움과 분명한 패자의 모습을 촬영하기 쉽다
- 닌자 전략은 짧은 시간이나 숨겨진 장소에서 벌어지기 쉬워 촬영하기 어렵다
- 영상 작품으로 만들 때는 “승자와 패자”라는 이야기로 편집하기 쉽다
즉 자연은 정직한 무사도가 아니다.
승자가 암컷에게 승인받는 제도도 아니다.
자연은 힘, 거리, 감시, 타이밍, 암컷의 선택으로 움직이는 현장 장악 게임이다.
패배한 수컷은 그저 풀이 죽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 다음 빈틈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 자료와 근거
Neff, B. D., & Pitcher, T. E. (2013). Polyandry and alternative mating tactics.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B.
- 수컷의 대안적 번식 전술에는 짝 지키기, 몰래 접근하는 행동, 암컷을 닮는 방식 등이 포함될 수 있다는 내용을 정리한다.
-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3576579/
Soltis, J., Thomsen, R., & Takenaka, O. (2001). The interaction of male and female reproductive strategies and paternity in wild Japanese macaques. Animal Behaviour.
- 높은 서열의 수컷이 많은 교미를 차지하는 한편, 낮은 서열의 수컷이 높은 서열의 수컷이 없는 곳에서 몰래 교미했고 암컷도 여러 서열의 수컷을 상대로 선택 행동을 보였다고 보고한다.
-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abs/pii/S0003347201917749
Williamson, M. J. et al. (2022). Ethical considerations in natural history film production and the need for industry-wide best practice. Global Ecology and Conservation.
- 자연사 다큐멘터리에서 극적인 이야기 구성, 의인화, 부정확한 정보가 생길 수 있는 위험을 다룬다.
-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235198942100531X
Howlett, K. et al. (2023). Wildlife documentaries present a diverse, but biased, portrayal of the natural world. People and Nature.
- 야생동물 다큐멘터리가 다양한 자연을 보여 주지만 척추동물 등 일부 분류군에 묘사가 치우칠 수 있음을 보고한다.
- https://besjournals.onlinelibrary.wiley.com/doi/full/10.1002/pan3.10431
Somerville, K. et al. (2021). Soap operas will not wash for wildlife. People and Nature.
- 야생동물 다큐멘터리에서 의인화와 위기 중심의 극적 서사를 사용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 https://besjournals.onlinelibrary.wiley.com/doi/full/10.1002/pan3.1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