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을 그만두면 한가할 줄 알았다. 아니었다
긴 휴식기에 들어가면 시간이 남을 줄 알았다.
실제로는 반대였다.
놀 계획, 여행, 이사, 주소 변경, 각종 계약, 생활 정리, 다음 직장의 입사 준비가 계속 생겼다. “직장”이라는 거대한 고정 일정이 사라지자 한가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일정이 앞으로 나온 것뿐이었다.
한동안은 회사 안내를 기다리느라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안내가 도착하자 주거, 이사, 복장, 통근, 주소 등록, 건강검진, 입사 당일 서류, 나중에 내도 되는 서류까지 퀘스트가 한꺼번에 열렸다.
자고 일어났더니 퀘스트가 늘어 있었다.
게임이면 반갑다. 현실이면 조금 귀찮다.
그래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예전에 나는 입사자가 아니라 입사자를 받는 쪽에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2. “아, 이거 알아”가 너무 많았다
계좌, 연금, 주소, 통근, 건강검진, 복장, 주거, 이사, 제출 기한, 첫날 가져갈 서류, 아직 발급되지 않아 나중에 내야 하는 서류.
내용 자체는 거의 익숙했다.
다른 것은 회사 고유의 양식, 제출처, 기한, 규칙뿐이었다.
그래서 안내가 많이 와도,
“이건 지금.”
“이건 주소 확정 후.”
“이건 비용 발생 후.”
“이건 이전 직장이 끝나야 생김.”
“이건 첫날 가져감.”
으로 나눌 수 있었다.
전직 입사 지원 담당자가 자기 자신을 입사시키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과거 운영 방식과의 차이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3. 예전에는 “사람이 매뉴얼”이었다
예전에 입사 지원을 할 때는, 신입에게 설명하기 전부터 문제가 생기곤 했다.
설명하는 사람이 필요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경우 안내문 있나요?”
“규정 좀 주세요.”
“최신 양식이 뭔가요?”
“이건 누가 가지고 있나요?”
“이 사람에게 뭘 설명해야 하죠?”
먼저 담당자가 회사 안에서 자료를 찾는다.
없으면 잘 아는 사람에게 묻는다.
그래도 부족하면 사람이 말로 메운다.
결국 담당자 본인이 거대한 외장 메모리가 된다.
입사자 입장에서는 친절해 보인다.
“담당자가 다 알려준다.”
하지만 운영 측면에서는 위험하다.
그 사람이 쉬면? 이동하면? 퇴사하면? 잊으면? 사람마다 설명이 다르면?
즉, 매뉴얼이 사람 머릿속에 있다.
이게 바로 업무의 개인 의존성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형태였다.
4. 이번에는 “매뉴얼이 실제로 매뉴얼 일을 한다”
이번 입사 준비는 철학이 달랐다.
안내가 온다.
읽는다.
해당되는 항목을 처리한다.
예외만 묻는다.
끝.
너무 당연해서 글로 쓰면 재미도 없다.
하지만 과거에 “안내자가 안내서를 찾는 것”부터 시작했던 사람에게는 꽤 충격적이다.
매뉴얼이 진짜 매뉴얼 역할을 하고 있다.
주거 정보는 주거 안내에 있다.
통근은 통근 안내에 있다.
제출물은 제출물끼리 정리되어 있다.
기한과 제출처가 적혀 있다.
대상이 아니면 “처리 불필요”라고 쓰여 있다.
담당자가 인간형 사용설명서가 될 필요가 없다.
입사자도 모든 문장을 처음부터 읽어주는 서비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 차이만으로도 양쪽의 업무량이 크게 줄어든다.
5. “대기업이 더 훌륭하다”가 아니라 규모가 커지면 인간 설명 방식이 무너진다
이걸 “대기업은 좋고 중소기업은 나쁘다”로 끝내면 너무 단순하다.
규모의 문제로 보면 이해하기 쉽다.
10명에게 설명하는 정도라면 숙련자 한 명이 직접 설명해도 된다.
하지만 수백, 수천, 수만 명이 되면 어렵다.
규모가 커질수록,
- 담당자가 달라도 같은 안내가 나가야 하고
- 한 사람이 쉬어도 멈추지 않아야 하며
- 최신 버전이 하나로 관리되어야 하고
- 직원이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하며
- 사람은 예외를 처리해야 한다
는 구조가 필요해진다.
조직 연구에서도 규모, 공식화, 규칙, 표준화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다뤄져 왔다. 또한 일부 중소기업 사례에서는 HR 시스템 도입 전까지 온보딩과 인사 관리가 종이, 스프레드시트, 수작업에 의존하고 직원 셀프서비스가 제한적이었다는 보고가 있다.
따라서 “대기업 사람들은 꼼꼼하다”라기보다, 규모가 커지면 표준화 없이는 운영이 버티기 어렵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작은 조직에서는 “그 사람에게 물어보면 다 알아”가 실제로 돌아간다.
돌아가기 때문에 개선이 늦어진다.
그리고 그 사람이 없어지는 순간 갑자기 어두워진다.
6. 중소조직의 장점도 있고, 표준화가 과하면 다른 지옥이 된다
표준화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작은 조직은 의사결정이 빠르고, 예외 대응이 유연하며, 바로 물어볼 사람이 있고, 규칙을 즉시 바꾸기 쉽다.
반대로 큰 조직은 표준화를 지나치게 하면,
“이 신청을 하려면 신청 권한을 먼저 신청해 주세요.”
같은 세계가 된다.
문서가 너무 많아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모른다.
시스템이 너무 많아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예외인데도 일반 절차에 억지로 끼워 넣는다.
이것도 건강하지 않다.
매뉴얼 연구에서도 문서가 실제로 도움이 되려면 내용이 단순하고, 접근이 쉽고, 문서량이 과도하지 않아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규정 개수가 아니다.
필요한 정보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순간에, 헤매지 않고 도착하는가.
그게 핵심이다.
7. 적성검사는 “설명서를 혼자 읽을 수 있나” 시험인가
자료를 계속 읽다가 잠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채용 때 본 적성검사, 이걸 위한 거였나……?”
물론 아니다.
적성검사는 사내 규정을 혼자 읽을 사람을 뽑는 비밀 시험이 아니다.
다만 큰 조직일수록,
“성인 직장인이니 안내를 읽고, 기한을 확인하고, 해당 자료를 제출하세요. 애매한 예외만 물어보세요.”
라는 전제를 두기 쉽다.
채용, 시스템, 매뉴얼, 문의 창구가 합쳐져서
‘스스로 움직일 사람에게,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준다’
라는 구조가 된다.
전직 입사 지원 담당자 입장에서는 이게 매우 편하다.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을 담당자가 매번 처음부터 낭독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예외와 상담에 쓰면 된다.
그게 사람을 가장 잘 쓰는 방법이다.
8. 일이 많은 게 아니라, 전부 보여서 많아 보인다
안내가 한꺼번에 왔을 때 첫 반응은 “너무 많다”였다.
하지만 정리해 보니 오늘 다 할 필요는 없었다.
주소가 확정되기 전에는 주소 등록을 못 한다.
비용이 발생하기 전에는 정산서를 완성할 수 없다.
이전 직장이 끝난 뒤에야 발급되는 서류도 있다.
즉, 실제 “지금 할 것”은 몇 개뿐이다.
나머지는 대기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0으로 만들고 놀고 싶어 하는 편이라, 보이는 업무가 많으면 전부 당장 없애고 싶어진다.
하지만 의존관계를 나누면 네 상자 정도면 충분하다.
지금 한다
→ 상대방을 기다린다
→ 조건이 생기면 한다
→ 당일 가져간다
업무 관리는 모든 일을 오늘 하는 기술이 아니다.
오늘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안심하고 오늘 안 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9. 일을 그만둬도 한가해지지 않는 이유
긴 휴가가 생기면 한가할 줄 알았다.
실제로는 약속, 공부, 여행, 생활 정리, 이사, 행정 처리로 계속 바쁘다.
그제야 알았다.
예전에 “시간이 없다”고 느낀 이유는 해야 할 일이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노동이 먼저 거대한 고정 시간 블록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블록이 사라지면 내가 선택한 일들이 들어온다.
신기하게도 내가 고른 일정으로 바쁜 것은 같은 “바쁨”이 아니다.
어떤 날은 그냥 돌아다닌다.
어떤 날은 여행을 계획한다.
어떤 날은 배운다.
어떤 날은 행정업무를 몰아서 처리한다.
한가하지는 않다.
다만 회사가 내 시간을 선점하지 않는다.
그 차이는 크다.
10. 결론 — “사람을 매뉴얼로 만들지 않는 것”은 꽤 강한 조직 능력이다
이번 입사 준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복지나 시설이 아니었다.
운영이 한 사람의 기억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이 매뉴얼이 되면, 친절할수록 더 바빠진다.
질문을 받는다.
찾는다.
설명한다.
빠진 부분을 메운다.
다음 사람에게 또 설명한다.
그리고 “그 사람만 안다”가 더 강해진다.
반대로 매뉴얼이 매뉴얼로 기능하면,
직원은 스스로 진행하고,
담당자는 예외를 보고,
사람별 설명 품질 차이가 줄고,
인수인계도 가벼워진다.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조직의 강함은 이런 지루한 곳에서 드러난다.
A형: 사람이 매뉴얼.
B형: 매뉴얼이 매뉴얼.
이상적인 상태는 사람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일반 처리는 시스템이 맡고, 판단이 필요한 순간에 사람이 돕는 것이다.
전체 경험을 가장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할 일은 많다.
하지만 뭘 해야 하는지는 전부 안다.
건강한 귀찮음이란 아마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참고 및 주의
- CIPD, Operating efficiently: implementing HR information systems in SMEs (2021).
https://www.cipd.org/en/views-and-insights/thought-leadership/insight/hr-systems-sme/ - CIPD, Operating efficiently: implementing HR information systems in large organisations (2021).
https://www.cipd.org/en/views-and-insights/thought-leadership/insight/hr-systems-large-organisations/ - 조직 연구에서는 규모, 공식화, 표준화가 반복적으로 중요한 조직 특성으로 다뤄져 왔다.
- Aase (1998), Handbooks as a tool for organizational learning: 매뉴얼이 경험 전달 도구로 기능하려면 단순성, 접근성, 과도하지 않은 문서량 등이 중요하다고 논의한다.
- 이는 모든 대기업이 표준화되어 있고 모든 중소기업이 개인 의존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본문은 익명화된 한 경험을 연구 배경과 함께 해석한 에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