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오늘 있었던 일을 AI에게 적어 본다. 화가 났던 순간도, 쓰다가 떠오른 다른 이야기도 순서에 신경 쓰지 않고 늘어놓을 수 있다. AI가 정리해 준 내용을 읽고 나면 머릿속이 조금 가벼워진다.
그런데 친구가 “무슨 일 있어?”라고 물으면 말문이 막힌다. 설명이 길어질 것 같고, 상대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도 잘 모르겠다. AI에게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싶다.
그럴 때는 AI와 생각을 충분히 펼쳐 보고, 사람에게는 지금 가장 들어 줬으면 하는 부분부터 건네 보자. 누군가에게 말하기 전에 감정을 모두 정리할 필요는 없다. “아직 정리가 안 됐는데, 잠깐 들어 줬으면 좋겠어”도 충분히 좋은 시작이다.
AI에게는 할 말의 초안을 도와달라고 하자
AI와의 대화는 뒤섞인 메모를 책상 가득 펼쳐 놓듯 활용할 수 있다. 집안일에 대한 불만을 적다가, 직장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처음의 질문이 도중에 바뀌어도 그대로 정리를 부탁하면 된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정리하는 게 싫다”고 생각했는데, 적어 보니 힘든 것은 일의 양보다 “나와 상의하지 않고 정해 버린 자잘한 규칙”이었다. 여기까지 알게 되면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것도 달라진다.
이 정도로 구체적으로 부탁해 보면 좋다.
- 이 메모를 ‘일어난 일’, ‘내가 받아들인 방식’, ‘아직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나눠 줘
- 내 설명만으로는 알 수 없는 점을 세 가지 짚어 줘
- 상대에게 고민을 이야기할 때 쓸 짧은 첫마디를 두 가지 만들어 줘
AI의 역할은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 더 잘 보이게 돕는 것이다. 상대의 속마음까지 알아맞혀 달라고 하면 정리와 추측이 뒤섞인다. 내용을 입력할 때는 나나 주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이름과 연락처, 직장의 기밀 등을 빼고, 상황만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쓰자.
말끔하게 들어맞는 설명일수록 한 번 더 확인하자
“당신이 지치는 것은 상대에게 통제받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답을 받으면 갑자기 모든 것이 설명되는 듯할 수 있다. 하지만 AI가 주로 보는 것은 내가 건넨 이야기다. 깔끔한 설명과 확인된 사실은 구분해서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
OpenAI는 언어 모델이 그럴듯한 오류를 내놓을 수 있으며, 평가 방식에 따라서는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보다 추측하는 쪽이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OpenAI의 설명
연구 이름이나 수치가 나오면 실제 출처를 열어 보자. 누구를 대상으로 한 연구인지, 무엇을 측정했는지, 내 상황에는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을지 살펴본다. 상대의 마음을 설명하는 답이라면 “다른 가능성은 뭐가 있을까?”라고 다시 묻고, 당사자에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남겨 두자.
예를 들어 “집안일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인격의 문제로 확대하지 않는 것이다. “빨래는 오늘 안에 꼭 개야 한다고 생각해?”라고 물으면 추측으로 채웠던 부분을 다시 대화로 풀어 갈 수 있다.
사람에게는 정답보다 ‘그 사람의 경우’를 물어볼 수 있다
친구와 이야기하는 재미가 늘 예상했던 정답을 듣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빨래 개는 걸 그만뒀어. 입을 사람이 바구니에서 꺼내 입어.”
이런 한마디를 듣고 나면 그토록 고민하던 규칙 자체가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 보이기도 한다. 다른 친구는 “눈에 보이는 곳이 어질러져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곳만 치워”라고 할 수도 있다. 두 사람의 생활에는 각자의 사정이 있다.
“어떻게 하는 게 맞을까?”와 함께 “너희 집에서는 어떻게 해?”, “어떤 것만큼은 양보하기 어려워?”라고 물어보자. AI와 함께 모은 아이디어에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생생한 경험이 더해진다.
상대도 내 이야기를 통해 무언가를 얻는다. 내 고민 이야기가 한 차례 마무리되면 “요즘 너는 어때?”라고 물어보자. 서로 이야기할 여유가 있어야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 단순히 답을 수집하는 시간이 되지 않는다.
사람에게 말하기 전에는 짧은 첫마디 하나를 준비하자
머릿속 이야기를 전부 설명하려고 하면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지칠 수 있다. 처음에는 있었던 일 하나와 지금 상대에게 바라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
“집안일 하는 방식 때문에 조금 다퉜는데, 계속 마음에 걸려. 지금 10분 정도 들어 줄 수 있어?”
“오늘은 해결책보다 일단 푸념을 좀 들어 줬으면 좋겠어.”
“이렇게 말해 보려고 하는데, 너무 날카롭게 들리지는 않는지 봐 줬으면 해.”
시간이 괜찮은지 먼저 물으면 상대도 응하기가 편하다. 여유가 없어 보이면 다른 날로 미룰 수 있다. 이야기하다 울어도, 말의 앞뒤가 흐트러져도 괜찮다. 짧게 준비하는 이유는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서지, 약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긴 메모를 AI에게 줄여 달라고 할 때는 “내 감정을 단정하지 말고, 친구에게 이야기를 꺼낼 때 쓸 첫 세 문장으로 만들어 줘”라고 부탁해 보자. 나온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고 평소에 쓰지 않는 표현은 고친다. 잘 쓴 문장보다 내 입으로 할 수 있는 말이 더 유용하다.
고민이 해결되지 않아도 함께 있는 시간에는 의미가 있다
고민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데도 돌아갈 때는 조금 편안해질 때가 있다. 차를 마시고, 상대의 목소리를 듣고, 같은 이야기에 웃었다. 그 시간 자체가 도움이 되기도 한다.
Coan과 Sbarra의 사회적 기저선 이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위험이나 필요한 노력을 느끼는 방식과 관련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누구와 이야기하든 안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아니다. 이론을 설명한 논문
이 이론을 근거로 AI는 생각을 정리하고 사람은 안도감을 준다고 엄격하게 역할을 나눌 필요도 없다. 친구가 생각을 정리해 줄 때도 있고, AI와 이야기하며 마음이 차분해질 때도 있다. 다만 함께 보낸 시간의 기억과, 상대에게도 사정과 감정이 있는 관계의 가치는 고민의 내용만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
누구와 만날지는 이야기를 나눈 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도 살피면서 정하자. 매번 나를 탓하거나 비밀을 퍼뜨리는 사람에게 굳이 깊은 속마음까지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같은 이야기를 맴돈다면 작은 마침표를 찍자
“그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같은 장면을 몇 번이고 떠올리다 보면 이야기하기 전보다 더 화가 날 수 있다. AI와 대화할 때든 친구와 이야기할 때든, 그런 느낌이 든다면 잠시 멈춰 보자.
두 사람이 문제나 불쾌한 감정을 반복해서 깊이 파고드는 것을 연구에서는 ‘공동 반추’라고 부른다. 아동과 청소년의 친구 관계를 살펴본 Rose의 연구에서는 공동 반추가 친밀한 우정과 관련이 있는 동시에 우울 및 불안의 측면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 결과만으로 성인의 푸념이 모두 해롭다거나, 이야기를 하면 증상이 생긴다고 말할 수는 없다. Rose의 연구
일상에서는 대화를 마칠 때 한 가지만 정해도 충분하다. “내일 당사자에게 물어보자”, “오늘은 결정하지 말고 자자”, “주말에 다시 생각해 보자”처럼 말이다. 이야기를 글이나 성과로 만들어 내지 않아도, 다시 쉴 수 있는 상태로 돌아왔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잘 마무리한 것이다.
AI와 생각을 펼치고, 사람에게 하나를 건네고, 선택은 내가 하자
누구에게 고민을 이야기할지 정하는 기준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다. 생각이 뒤엉켜 있다면 AI에게 정리를 도와달라고 하자. 다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느끼고 살아가는지 궁금하다면 질문 하나를 건네 보자. 그저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 날에는 그렇게 말해도 된다.
다음에 AI에게 긴 이야기를 적었다면 마지막에 “여기서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건 뭘까?”라고 생각해 보자. 전부 요약하려 애쓰기보다 “이것만은 한번 물어보고 싶다”는 것 하나를 찾으면 된다.
AI와의 대화에서 내 생각을 표현할 말을 찾고, 사람과의 대화에서 나와 다른 삶을 접한다. 그 두 가지를 가져와 내일 어떻게 할지는 스스로 선택하자. 고민을 나누는 자리가 꼭 말끔한 결론을 내놓아야 하는 자리일 필요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