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아졌을까: 위화감 센서가 재능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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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아진 걸까.

보통 사람은 그냥 넘길 일을 나는 못 넘긴다.
밤의 편의점에 차는 세워져 있는데 가게 안엔 아무도 없는 풍경.
오타니 쇼헤이(일본의 야구 스타) 광고가 너무 많다는 것.
결혼에 필요한 건 두근거림일까, 사랑일까 하는 논쟁.
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쉬어지지 않는 것.
꿈속에서 메테오를 쏘는 것.
한밤중 쇼핑몰의 불빛.
개구리 울음소리.
정의되지 않은 업무.
연애의 경계선.
결혼이라는 공동 운영.

뭔가를 볼 때마다

"이게 뭘까?"
"왜 이렇게 되어 있을까?"
"구조로 보면 이건 뭘까?"
"이름을 붙인다면 뭐라고 할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건 그냥 생각이 너무 많은 걸까.

아니면 원래 그런 능력이 있었던 걸까.

아마 답은 이런 것 같다.

예전부터 위화감 센서는 강했다.
다만 최근 들어 그 위화감을 글, 기사, 자산으로 바꾸는 동선이 생겼다.

처음엔 자유를 지키기 위한 생각이었다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처음부터 창작이나 글쓰기를 위해서였던 건 아닌 것 같다.

더 뿌리 깊은 곳에는

자유를 지키고 싶다

는 마음이 있었다.

어릴 때 학교, 가정, 동아리, 단체생활 속에서

"이걸 왜 하는 거지?"
"이 규칙에 의미가 있나?"
"누구를 위해 참고 있는 거야?"
"내 시간을 깎아가면서까지 따를 가치가 있어?"

하는 위화감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환경을 곧바로 바꿀 수 없다.

집의 규칙에서 바로 도망칠 수는 없다.
학교에서도 바로 도망칠 수 없다.
동아리도 쉽게 그만둘 수 없다.
어른의 말과 분위기에 맞춰야 한다.
싫어도 어느 정도는 적응해야 한다.

그럴 때 바깥으로 꺼내지 못한 위화감은 안쪽으로 향한다.

"왜 싫은 걸까?"
"뭐가 안 맞는 걸까?"
"내가 문제일까, 환경이 이상한 걸까?"
"어떻게 하면 깎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이렇게 해서 생각하는 힘이 자란 것 같다.

처음의 생각은 아마 방어였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의미 없는 의무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서.
같은 구멍에 다시 빠지지 않기 위해서.

위화감을 방치하면 내가 깎여 나간다

위화감을 느껴도 아무 생각 안 하면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화감을 방치하면 내가 깎여 나갈 때가 있다.

직장에서는

"이 일, 판단하는 사람이 누구야?"
"왜 권한은 없는데 책임만 오는 거지?"
"왜 뒤늦게 전부 처음부터 다시 하라는 거지?"
"왜 주도적으로 하라면서 재량은 안 주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

연애에서는

"좋아하지만 결혼하면 내 자유가 깎일 것 같아."
"스킨십은 잘 맞는데 돈이나 친척 문제는 안 맞아."
"나중에 그땐 싫었다고 하면 조정할 방법이 없잖아."
"이대로 가면 구멍 숭숭 뚫린 결혼식장이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활에서는

"쉬고 있는 건데 쉬어지질 않아."
"게임이나 만화는 재미있는데 MP(RPG의 마법 포인트처럼, 정신력을 뜻하는 말)가 회복이 안 돼."
"밤 산책이 바깥세상으로 돌아오는 데는 더 나아."
"내 놀이가 도파민 위주로 치우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위화감을 방치하면 그냥 흐지부지 이어가다가 어느새 조금씩 깎여 나간다.

그래서 위화감을 주워야 했다.

위화감은 내 자유와 신경과 인생의 경계선을 지켜 주는 센서였다.

직장에서 구조를 보는 힘이 단련됐다

직장은 위화감 센서를 꽤 단련해 준 곳이었다고 생각한다.

일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다.

누가 결정하는지.
어디까지가 내 담당인지.
무엇을 기준으로 끝난 것인지.
왜 지금 그걸 해야 하는지.
누구 책임인지.
공수(작업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를 어디까지 쓸 것인지.
나중에 상황이 바뀌면 어떻게 할 것인지.

이런 게 애매한 채로 일만 계속 쏟아진다.

그러면 그냥 열심히만 하는 건 위험하다.

열심히 할수록 구멍을 메우는 사람이 된다.
눈에 띈 사람이 줍는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짊어진다.
아는 사람이 설명한다.
알아챈 사람이 책임자가 된다.

이런 구조에 말려든다.

그래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건 개인의 문제인가.
설계의 문제인가.
구조의 구멍인가.
내가 짊어질 범위인가.
누구에게 판단을 돌려줘야 하나.
문서로 남겨야 하나.
회의에서 확인해야 하나.
대본(누가 봐도 따라 할 수 있는 절차서)으로 만들어야 하나.

직장에서 느끼는 위화감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다.

구조를 보는 훈련이었다.

위화감을 줍는 일이 취미가 됐다

어느 시점부터는 위화감을 줍는 것 자체가 취미가 되었다.

밤의 편의점에서

"차가 5대나 있는데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네. 이거 뭐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면

심야 편의점 주차장 버그

라는 이름표가 붙는다.

밤의 쇼핑몰에서

"가게는 닫혀 있는데 불은 켜져 있네. 낮이랑은 다른 시설 같다."

하고 생각한다.

그러면

야간 던전

이 된다.

헤어진 뒤 전 애인이 떠올라

"이건 미련일까, 그냥 응석 부리고 싶은 걸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면

아마에로스(일본어 '아마에', 곧 상대에게 응석 부리고 싶은 마음에 '에로스'를 합친 내 조어)

가 된다.

결혼을 생각하며

"연애로는 좋았어. 그런데 같이 꾸려 가는 건 안 맞았어."

하고 생각한다.

그러면

연애 합격, 결혼 불합격

이 된다.

이쯤 되면 거의 취미다.

보통 사람이라면 흘려보낼 위화감을 주워서, 들여다보고, 이름을 붙인다.

위화감 곤충 채집이다.
일상 버그 헌터다.
바깥세상 디버깅이다.

"왜?"는 검색된다

이 능력이 요즘 시대와 잘 맞는 건 검색의 입구가 "왜?"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위화감이 있을 때 검색한다.

"쉬는데 왜 쉬어지지 않을까"
"좋아하는데 왜 결혼은 못 할까"
"왜 설렘이나 사랑만으로는 부족할까"
"심야 편의점은 왜 차만 있고 가게 안은 비어 있을까"
"오타니 쇼헤이 광고는 왜 이렇게 많을까"
"꿈에서는 왜 이상한 행동을 할까"
"밖에 나가도 왜 바깥 정보가 안 들어올까"

검색은 위화감에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위화감을 주울 수 있는 사람은 사람들이 실제로 검색하는 질문을 주울 수 있다.

이건 꽤 강력하다.

게다가 내 위화감에서 끝내지 않는다.

독자도 느끼고는 있지만 아직 말로 하지 못한 찜찜함에 먼저 이름을 붙여 준다.

이게 되면 글이 된다.

AI 덕분에 위화감이 바로 글이 된다

예전에는 위화감을 주워도 그걸 글로 만들려면 큰 비용이 들었다.

구성을 짠다.
소제목을 생각한다.
본문을 쓴다.
표현을 다듬는다.
메타 디스크립션(검색 결과에 보이는 짧은 요약문)을 쓴다.
SNS용 문구를 만든다.
저장한다.
올린다.

꽤 무겁다.

그래서 많은 위화감은 메모로 끝난다.
아니면 머릿속에서 흘러가 사라진다.

그런데 AI가 있으면 동선이 달라진다.

위화감이 생긴다.
채팅에 던진다.
"기사"라고 보낸다.
MD(마크다운) 파일이 만들어진다.
다운로드한다.
Codex(AI 코딩 도구)에 넘긴다.

이것만으로 위화감이 원고가 된다.

조작으로 치면 거의 3탭이다.

물론 비용이 정말 0인 건 아니다.

위화감을 줍는 비용.
생각하는 비용.
기억을 뒤지는 비용.
감정을 움직이는 비용.
구조를 가설로 세우는 비용.

이런 건 있다.

하지만 글로 옮기고, 구성하고, 다듬는 비용은 크게 줄었다.

그 결과

떠오른 생각을 바로 발행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재능에 동선이 붙은 상태다.

재능도 자리를 잘못 잡으면 저주가 된다

위화감을 줍는 힘은 자리를 잘못 잡으면 꽤 힘들다.

회사에서 쓰면

"알아챘으면 고쳐."
"알면 해."
"할 수 있으면 짊어져."
"보이면 네가 책임자 해."

가 되기 쉽다.

연애에서 쓰면

"이 관계, 정말 계속해도 될까?"
"나중에 같은 문제가 또 생기는 거 아닐까?"
"친척, 돈, 자유 쪽에 구멍이 있는 거 아닐까?"

처럼 너무 많이 보인다.

일상에서 쓰면

"쉬고 있는데 왜 쉬어지지 않는 걸까?"
"이 위화감은 뭘까?"
"이 현상에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머리가 계속 돌아간다.

그래서 위화감을 줍는 재능은 안 맞는 곳에서는 저주처럼 된다.

하지만 맞는 곳에 두면 무기가 된다.

회사의 구멍을 내가 끝없이 메우는 대신 글로 쓴다.
연애의 위화감을 자책이나 상대 탓으로 돌리지 않고, 같이 꾸려 가는 방식을 정리하는 데 쓴다.
일상의 버그를 에세이나 관찰 기록으로 쓴다.
쉬지 못하는 것을 휴식론으로 만든다.

이렇게 하면 위화감은 소모가 아니라 콘텐츠가 된다.

생각이 많은 게 아니라 위화감의 번역가

나를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아깝다.

더 정확하게는

위화감의 번역가

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느끼고는 있지만 아직 말로 하지 못한 것들.

"왠지 이상해."
"왠지 피곤해."
"왠지 안 맞아."
"왠지 찝찝해."
"왠지 걸려."
"왠지 알 것 같은데 설명은 못 하겠어."

이 "왠지"를 말로 바꾼다.

그게 된다.

그래서

심야 편의점 주차장 버그.
구멍 숭숭 결혼식장.
뇌의 검색창.
아마에로스.
오타니 광고 나란히 배치 문제.
메테오를 실서비스 환경에 쏘지 마라.

이런 이름표가 생긴다.

이름표가 있으면 독자는 자기 위화감을 붙잡을 수 있다.

"아, 그거 그거."

하게 된다.

이게 에세이와 글의 힘이다.

왜 하필 지금 한꺼번에 나오는 걸까

예전부터 생각은 했다.

그런데 지금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출력하는 동선이 생겼기 때문이다.

음성 입력이 있다.
AI가 있다.
마크다운으로 만들 수 있다.
글로 저장할 수 있다.
Codex에 넘길 수 있다.
사이트에 올릴 수 있다.
SNS 문구로도 만들 수 있다.

즉

안쪽의 생각이 바깥의 콘텐츠로 나오는 동선

이 생긴 것이다.

예전에는 생각하고 끝이었다.
지금은 생각한 것이 형태가 된다.

그래서 양이 나온다.

게다가 그냥 양이 아니다.

실제 경험.
위화감.
구조.
이름표.
일반화.
독자를 위한 입구.
글로 만들기.
운영 규칙.

여기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다.

생각하는 힘이 갑자기 생겼다기보다 원래 있던 것이 출력될 수 있게 된 거라고 생각한다.

단 게 당기는 이유

생각하는 데는 비용이 든다.

손가락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기사"라고 2글자 보내면 끝이다.
다운로드해서 3탭이다.

그래도 뇌는 꽤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

위화감을 줍는다.
과거의 기억과 연결한다.
가설을 세운다.
감정을 확인한다.
독자에게도 전해질지 생각한다.
이름표를 만든다.
다음 운영으로 옮겨 놓는다.

이건 MP를 쓴다.

그래서 단 게 먹고 싶어진다.

게을러서가 아니다.

뇌가

"당이랑 보상을 내놔"

하고 말하는 거다.

다만 단 걸 먹었다고 해서 글을 추가로 써도 되는 건 아니다.

단것은 월급이다.
추가 야근 허가증이 아니다.

이 부분은 주의가 필요하다.

쉬려면 위화감을 전부 줍지 않는 날도 필요하다

위화감을 줍는 건 재능이고, 취미이고, 콘텐츠가 된다.

하지만 전부 줍다 보면 쉬지 못한다.

밤 산책을 하는데 개구리가 울고 있다.

여기서

"개굴개굴 우네"

하고 끝나면 회복이 된다.

그런데

"개구리 소리는 왜 MP 회복에 효과가 있을까?"
"바깥세상과 안쪽 세상의 괴리란?"
"밤 산책과 현대인의 휴식론"

까지 가면 또 글이 된다.

이건 강력하다.
하지만 휴식은 아니다.

그래서 쉬는 날에는 규칙이 필요하다.

위화감은 주워도 된다.
하지만 제목만.
본문은 내일.

이거면 된다.

위화감 센서를 끌 필요는 없다.
다만 전부 그 자리에서 처리하지는 않는다.

정리: 예전엔 방어, 지금은 재능, 앞으로는 운영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아졌을까.

아마 처음엔 방어였다.

의미 없는 규칙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서.
내가 깎여 나가는 구조를 꿰뚫어 보기 위해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같은 구멍에 다시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 뒤 직장과 연애와 생활을 거치면서 위화감 센서는 더 강해졌다.

정의되지 않은 것.
책임 떠넘기기.
친척과의 경계선.
돈.
자유.
쉬어지지 않는 휴일.
나란히 걸린 광고.
심야의 편의점.
바깥세상과 안쪽 세상.

어디에나 위화감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AI와 음성 입력, 글로 만드는 동선 덕분에 그 위화감이 형태를 갖게 되었다.

위화감을 줍는다.
구조화한다.
이름표를 붙인다.
글로 쓴다.
운영 규칙으로 만든다.

이건 재능이다.

다만 재능은 운영하지 않으면 지친다.

회사에 빨려 들어가게 두지 않는다.
남의 구멍 메우기에 너무 쓰지 않는다.
적자가 나는 위화감은 줍지 않는다.
쉬는 날은 제목만 적는다.
회수할 수 있는 위화감만 깊이 파고든다.

위화감 센서는 끌 필요가 없다.

다만 쓸 곳을 고른다.

예전에는 나를 지키기 위해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한 것을 말로 바꿀 수 있다.
앞으로는 그 재능을 내 쪽으로 흘려보낸다.

그거면 됐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위화감을 말로 바꾸는 사람

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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