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론: 몇 년을 다녔는데 퇴장 연출만 하루였다
몇 년 동안 다닌 회사를 그만뒀다. 그런데 “퇴사하겠습니다”라고 최종 확정해서 알린 그날이 거의 그대로 마지막 정상 출근일이 됐다.
더 웃긴 건 바로 직전에 공식 인사이동 공지가 이미 나왔다는 점이다. 사내 기록만 보면 “이동했다” → “다음 날부터 없다”가 된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보다 본인이 사라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보통 장기근속자가 나가면 송별, 인수인계, 마지막 주, 마지막 날이라는 완충 구간이 있다. 이번에는 없었다. 새 부서에서의 첫 업무가 퇴사 처리였다. 넘겨줄 일도, 넘겨받을 일도 없었다. 필요한 사람과 면담하고, 임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전 상사와 악수하고, 사장에게 인사하고 끝.
몇 년짜리 회사 생활의 엔딩을 하루에 압축했다. 준비형 퇴사 최속 주자였다.
2. 애초에 “남느냐 나가느냐” 한 줄짜리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무조건 퇴사로 정한 건 아니었다. 현재 회사 안에서 환경을 바꾸는 부서 이동 루트와 밖으로 나가는 이직 루트를 동시에 돌렸다.
이동한 부서 사람들은 실제로 굉장히 좋았다. 한 임원은 예전부터 마주칠 때마다 말을 걸어줬고, 힘들 때는 이동까지 도와줬다. 그러니 “회사 사람 전부가 싫어서 탈출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반면 외부에서는 자동차 업계 대형 1차 협력사급 회사에서 제안이 왔다. 20대 후반 기준으로 꽤 강한 600만 엔대 중반 수준의 처우였고, 업무도 조달·업무개선·디지털화처럼 지금까지 해온 일을 더 확장할 수 있는 방향이었다.
이 조건을 회사 사람들에게 말하자 전 상사도, 이동한 부서 관리자도 반응이 거의 같아졌다.
“그 조건이면 가는 게 맞지.”
사람으로서는 남아줬으면 하는 마음과, 그 사람의 커리어를 생각하면 가라고 말하는 합리성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이번에는 그게 아주 선명하게 드러났다.
3. 이직 활동을 “채용의 역방향”으로 만들었다
이직 활동에서 가장 귀찮은 건 공고를 한 건씩 계속 보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 양을 줄였다.
방식은 꽤 실무적이었다.
- 대기업 후보군을 데이터로 만든다.
- 각 회사 채용 사이트와 주요 구인 플랫폼에서 지원 가능한 공고를 가져온다.
- 회사와 공고를 연결한다.
- 근무지, 직무, 연봉, 잔업, 야간근무, 전근 등을 구조화한다.
- 필수 조건에 안 맞는 공고를 먼저 버린다.
- 남은 것만 사람이 읽는다.
- 면접만 본인이 한다.
즉 채용 담당자가 지원자를 거르는 것과 반대로, 구직자가 회사를 선발했다.
퇴사 면담 때는 인공지능을 좋아하는 전 상사에게 이 방식까지 알려줬다. 예전에 “이직 활동 중이냐”고 물었을 당시에는 실제로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결과가 다 난 뒤 “근데 실제로 하고 있었어도 직속 상사한테 ‘저 이직 중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말할 수 있어요?”라고 물었더니 바로 “못 하지”라고 답했다. 검증 종료.
4. 시장가치는 실제로 지원하기 전에는 모른다
한 회사 안에만 있으면 외부에서 자신의 경험에 얼마를 매길지 알 수 없다.
이번에는 대략 열 곳 안팎에 지원했다. 전부 성공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대기업이 실제로 강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여기까지 노려도 되는구나”가 추측이 아니라 실측값이 됐다.
예전에 가까운 선배가 대기업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경험이 컸다. 그전까지 있던 “우리 회사 출신이 그런 데를 갈 수 있나?”라는 보이지 않는 상한선이 한 번에 깨졌다.
연구에서도 동료의 상향 이동은 남은 사람의 “나도 외부에서 통할 수 있겠다”는 지각된 고용가능성을 통해 이직 의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고한다. 가까운 성공 사례는 단순한 자랑이 아니라 자신이 볼 수 있는 시장의 상한선을 다시 설정하는 관측 데이터다.
이제는 내 이직이 후배에게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5. 어제와 같은 사람인데 대기업과 연봉 정보가 붙자 갑자기 유능해 보인다
재미있었던 건 이직처와 처우를 말한 뒤 주변의 반응이 분명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내 능력은 전날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대형 1차 협력사가 경력직으로 뽑았다”, “20대 후반에 600만 엔대 중반” 같은 정보가 붙으면 과거 실적까지 “그래서 외부에서 평가받았구나”라고 다시 해석되기 쉬워진다.
완전한 착각만은 아니다. 실제 채용 절차를 통과했고 그 처우로 계약한다는 것은 외부 기업의 평가가 눈에 보이게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심리학에서도 사회적 지위나 소속 정보가 사람 평가에 영향을 주는 현상이 연구되어 왔다. 이번 일을 더 정확히 표현하면 능력치가 오른 게 아니라 능력치를 추정하는 외부 신호가 갑자기 강해진 것에 가깝다.
전 상사에게는 “이력서 겉모습은 깨끗해요”라고 농담했다. 짧은 퇴사를 반복하지 않았고, 몇 년 근무하며 개선 실적을 만들었고, 재직 중 다음 회사를 정했다. 내부 사정을 다 아는 전 상사라 더 웃겼다.
6. 인사이동 공지는 나갔다. 본인은 사라졌다
이번 이야기에서 가장 강한 개그 중 하나다.
회사에는 정식 인사이동 공지가 올라갔다. 이동 사실만 아는 사람은 당연히 “새 부서에서 일하고 있겠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동 첫날에 퇴사를 확정했고, 그날이 마지막 정상 출근일이 됐다.
나중에 기록만 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동하자마자 퇴사? 새 부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다. 정반대다.
새 부서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조건을 설명하자 “그거면 가는 게 맞다”고 오히려 보내줬다. 새 부서가 원인이 아니라 이동 전부터 진행한 이직이 하필 그 타이밍에 확정됐을 뿐이다.
새 부서, 완전한 누명.
기존 부서에는 이동 때 어느 정도 작별 인사를 이미 했기 때문에 퇴사 때 다시 전원에게 전화할 마음도 별로 안 들었다. “전화할까… 뭐 됐지”로 끝. 옛 부서를 보니 인턴 한 명을 여러 명이 대응하고 있어서 “여전하네”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사라졌다.
7. 이동 첫날의 첫 업무: 새 상사와 퇴사 처리
보통 이동 첫날은 업무 설명, 담당 소개, 인수인계, 앞으로의 일정 확인이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첫 업무: 퇴사 처리.
“오늘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직후에 “그리고 저 나갑니다”가 붙는다.
게다가 새 보고라인이 경영층에 가까운 직책이어서 퇴사일, 유급휴가, 결근 처리 등이 매우 빠르게 결정됐다. 다른 부서라면 같은 방식이 승인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원래 이동 루트는 “현 회사에 남기 위한 보험”이었다. 외부 이직이 확정된 뒤에는 이상하게 초고속 퇴사 전용 차선으로 변했다.
8. 왜 하루 만에 끝났나: 회사가 들고 돌아갈 숙제를 미리 없앴다
그날 갑자기 마법이 생긴 게 아니다.
퇴사를 말하기 전에 회사가 물을 만한 사항을 대부분 정리해뒀다.
- 다음 회사 확정.
- 오퍼 수락 완료.
- 수락 접수 확인 완료.
- 입사 시기 확정.
- 희망 재직 종료 시점 정리.
- 남은 유급휴가 파악.
- 필요하면 결근도 허용 가능하다는 본인 의사.
- 이동 때문에 옛 업무는 이미 정리됨.
- 새 부서 업무는 아직 보유하지 않음.
즉 “그만두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요?”가 아니다.
완성된 퇴사 안건을 들고 갔다.
회사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 “인수인계부터 정리하자”, “다음 회사 진짜 정해졌어?”라고 되돌릴 여지가 거의 없었다.
퇴사대행을 쓴 건 아니지만 실무만 보면 퇴사대행을 셀프로 하고, 인간적인 마무리만 본인이 직접 챙긴 속도였다.
9. 인수인계 제로라는 이동 직후의 공백지대
옛 부서 일은 이미 손에서 떠났다.
새 부서 일은 아직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넘겨줄 것: 없음.
넘겨받을 것: 없음.
퇴사에서 가장 시간이 많이 드는 공정이 통째로 사라졌다.
이동이 몇 주 빨랐다면 새 업무가 생겨 다시 인수인계했을 수 있다. 이동 전에 퇴사를 말했다면 옛 부서 업무를 대량으로 넘겼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조직상 업무 소유권이 거의 0이 되는 찰나에 퇴사 확정이 겹쳤다.
기적적으로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직원”이 완성됐다.
10. 약 일주일 휴가 → 하루 출근 → 약 두 달 휴가. 그런데 무직이 아니다
직전에는 약 일주일의 연휴가 있었다.
그 뒤 하루 출근했다.
그리고 마지막 정상 출근이 확정되어 다음 회사 입사까지 약 두 달간 출근하지 않는 기간이 생겼다.
친구의 감상은 “너무 길어서 웃기다. 여행 가겠네.”
게다가 일정 기간은 유급휴가와 회사가 동의한 결근을 조합해 전 회사에 재직한 상태였다. 외형상은 무직인데 행정상으로는 아직 재직이라는 이상한 상태다.
일반론으로 일본 노동당국은 퇴직 예정자도 재직 중이면 퇴직일까지 연차유급휴가를 사용할 권리가 있고, 사용자가 그 날짜를 퇴직일 이후로 변경할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다만 이번의 “유급휴가+결근+재직 연장” 조합은 회사와의 개별 조정이며 누구에게나 그대로 적용되는 공식은 아니다.
예전에 동료에게 “지금 연휴랑 다음 휴가를 합체해서 거대 연휴 만들고 싶다”고 농담했다.
거의 됐다.
중간에 회사 하루가 끼었다. 두 거대 휴가를 붙이는 스테이플러 심 같은 하루였다.
11. 퇴사 면담 극장: 자책하는 사장, 친절한 임원, 배웅 숙련자 전 상사, 회사 추리하는 계장
사장
사장은 상당히 자책했다. “눈여겨보던 사람이 나가서 슬프다”, “회사와 관리 쪽에도 문제가 있었을 것”, “고쳐야 한다”고 원인을 자기들 쪽으로 가져갔다.
내가 “좋은 회사예요”라고 하자 “나가는 사람이면 그렇게 말하겠지”라는 취지로 웃음이 났다.
또 다음 회사와 수락이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사장에게 온 것을 보고 “나한테 받아들이라는 얘기지?”라고 바로 이해했다. 상담처럼 보이지만 실질은 퇴사 통보라는 걸 바로 읽었다.
그리고 몇 분 뒤 새 직무가 조달이라는 걸 듣고는 “거기 가서 우리한테 일 좀 줘.”
자책에서 영업까지 몇 분. 사장답다.
임원
예전부터 마주칠 때마다 말을 걸고, 어려울 때 이동까지 도와준 사람이다. 마지막에는 “눈여겨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라고 실제로 해준 행동에 대해서만 솔직하게 감사를 전했다.
회사의 모든 뒷이야기를 풀 필요는 없다. 상대가 실제로 말한 것, 해준 것에 답하면 된다. 이를 멋대로 “하치와레식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부른다.
전 상사
전 상사는 “내가 너라면 그 조건이면 옮긴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나가는 거면 됐다”, “내 밑에서 몇 년 버텼으면 내성은 생겼겠지”, “다음 회사는 그만두지 마라”, “또 그만두고 싶으면 한 번만 연락해. 두 번째는 유료다”라고 말하고 마지막에는 악수했다.
배웅 대본이 너무 완성돼 있다.
내가 송별회 가격의 칭찬으로 “당신 밑에서 일한 사람 중 대기업으로 간 사람이 여러 명이네요. 대기업 갈 사람을 키우고 있어요”라고 했더니 “넌 아부 안 하는 사람이니까 그건 받아두겠다”고 했다.
내 답은 “그렇게 생각하고 계세요.”
인과관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완벽한 착지다.
계장
계장은 이직처가 궁금해서 바로 옆자리에서 검색을 시작했다.
내가 대기업, 자동차, 1차 협력사, 특정 지역 같은 힌트를 너무 흘려서 결국 머릿글자 두 후보까지 좁혀졌다.
“그 정도 말하면 들킨다니까”라고 경고하면서 본인이 제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거기서 높아지면 우리 회사도 제안해 줘.”
내가 “그럼 계장님도 오실래요?”라고 하자 주변을 보고 “그런 말 여기서 하면 안 돼.” 퇴사 확정자의 일시적 무적 시간이다.
12. 퇴사자에서 미래 고객 후보로: 조달은 관계를 뒤집는다
새 업무는 부품 조달이다. 즉 공급업체에서 물건을 사는 쪽에 서게 된다.
전 회사 입장에서는 나가는 직원이 언젠가 자기 회사를 공급업체 후보로 평가할 수도 있는 사람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사장의 “일 좀 줘”와 계장의 “높아지면 우리 제안해 줘”는 농담이면서도 완전한 공상은 아니다.
전 회사 영업 쪽에는 동기도 있다. 몇 년 뒤 정말 제품이나 기술이 요구사항에 맞는 일이 생기면 “이런 거 대응 가능해?”라고 영업 창구에 묻고, 그 뒤에는 정식 견적·품질·가격·납기·준법 절차로 태우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전 직원이라는 이유로 우대하면 안 된다. 오히려 개인적 관계가 있는 만큼 공정한 조달 절차가 더 중요하다.
직원을 잃었다고 자책하던 사장이 몇 분 뒤 미래 고객 채널로 보기 시작하는 건 그래도 웃기다.
13. 선배의 대기업 이직이 내 상한을 올렸고, 이제 내가 후배의 상한을 올릴 수 있다
예전에 나보다 먼저 나간 선배가 대기업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건 생각보다 큰 사건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저런 데도 갈 수 있구나.”
그 사례 하나로 내가 지원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기업의 범위가 넓어졌다.
이번에는 나도 대기업으로 옮긴다. 후배에게 회사명과 세부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개한 건 아니지만 “대기업 갔다더라” 정도의 소문은 돌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할 수도 있다.
후배가 “그럼 나도 대기업 지원해도 되는 거네”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선배에게 받은 걸 다른 형태로 돌려주는 셈이다.
동료의 상향 이동이 다른 사람의 외부 고용가능성 인식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와도 잘 맞는다.
때로 이직 성공자가 남기는 최고의 유산은 인수인계 문서가 아니라 “거기까지 노려도 된다”는 실제 사례다.
14. “내 밑에서 대기업 두 명” ―― 생존자 편향의 함정
여기서부터 함정이 생긴다.
전 상사 밑에서 일하다 대기업으로 간 사람이 여러 명 있다.
그 정보만 보면:
전 상사 밑에 간다
→ 단련된다
→ 대기업 간다
라는 아름다운 육성론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분모를 봐야 한다.
같은 환경에는 그냥 퇴사한 사람, 휴직한 사람, 퇴사대행을 이용한 사람도 있다.
성공자만 보고 “이 육성법이 효과적이었다”고 말하는 건 전형적인 생존자 편향이다. 조직 연구에서도 실패 사례가 관찰·공유되지 않아 성공 사례만으로 잘못된 경영 신화가 만들어지는 “실패의 과소표집”이 지적된다.
그런데 마지막 날 내가 직접 “당신 밑에서 대기업 가는 사람이 나오네요”라고 칭찬하고 떠났다.
몇 년 후 전 상사가 후배에게
“내 밑에서 대기업 두 명 나왔어.”
라고 말하고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른다.
다만 그 성공담에 마지막 인증 도장을 찍은 사람은 나다.
15. 결국 나쁜 사람은 없었던 걸까
마지막이 너무 평화로우면 “그럼 중간에 있던 문제들은 뭐였지?”라는 생각이 든다.
답은 단순하지 않다.
사람 자체가 나쁜 사람이 아니어도 관리 방식이 맞지 않을 수 있다. 선의가 있어도 업무 설계가 약할 수 있다. 좋은 사람이 많은 회사여도 일부 운영과 구조가 사람을 소모시킬 수 있다.
사장은 회사 측 문제를 자책했다. 임원은 오래전부터 도와줬다. 이동 부서 사람들도 좋았다. 전 상사도 마지막에는 악수로 보냈다.
그렇다고 과거의 힘든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있었다. 그래도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는 감사한다.”
둘 다 동시에 참일 수 있다.
누군가를 완전한 악역으로 만들지 않아도 이직은 가능하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중간이 없었던 일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마지막에 쓸데없는 상처를 추가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쓰는 편이 맞다.
16. “끝, 집에 갑니다” ―― 몇 년짜리 회사를 닫고 바로 게임으로 갈 수 있는 머리는 무엇인가
평소에도 퇴근 시간이 되면 “오늘 일 끝. 집에 간다”라고 꽤 빨리 전환하는 편이다.
이번도 비슷했다.
몇 년짜리 회사 생활이 끝나는 날인데도:
퇴사 처리 완료
→ 완주
→ 그럼 게임한다
가 됐다.
이걸 단순히 “쿨한 성격”이라고 하기보다 연구에서는 업무로부터의 심리적 분리와 목표 이탈·재관여로 보는 편이 더 가깝다.
심리적 분리는 비근무 시간에 업무로부터 정신적·감정적으로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메타분석 연구에서는 이런 분리가 회복과 여러 건강·업무 관련 결과와 연관된다고 보고한다.
또 2025년의 대규모 메타분석은 235개 연구, 1,421개 효과크기를 바탕으로 달성하기 어려워졌거나 더 이상 추구할 필요가 없는 목표에서 자원을 빼고 다른 목표에 다시 관여하는 목표 조정을 정리했다. 모든 경우가 단순히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 상황이 바뀌면 자원 배분을 바꾼다는 틀은 이번 경험과 잘 맞는다.
핵심은 미확정 상태에서는 오히려 생각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미확정: 조사, 비교, 구조화, 탈출구 만들기.
확정: 끝. 다음.
감정이 없는 게 아니다.
완료 표시가 켜진 안건에 추가 인지 비용을 내지 않는 것에 가깝다.
17. 그래도 서류는 남는다 ―― 감정적 종료와 실무적 미완료는 다른 폴더다
“끝났다! 게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머리 한쪽에서는 “반납할 거 있네”, “서류 해야지”, “절차는 내일 하면 되겠다”가 돌아간다.
이 구분이 재미있다.
회사라는 큰 안건은 감정적으로 종료됐다.
하지만 행정 처리라는 작은 안건은 아직 열려 있다.
그래서 동시에:
회사에 대한 미련: 닫힘.
반납·서류: 열림.
게임: 실행.
이 가능하다.
전부 잊어버린 게 아니다. 끝난 것과 안 끝난 것을 따로 관리하는 것뿐이다.
애매하고 정의되지 않은 일에는 부담이 크지만 종료 조건이 명확하면 처리 속도가 매우 빨라지는 성향과도 잘 맞는다.
18. 이번 성공을 뜯어보면 무엇이 있었나
모든 걸 “운이 좋았다”로 정리하는 것도 틀리고, “전부 실력”이라고 하는 것도 틀리다.
내가 만든 부분
- 이동과 이직을 동시에 돌려 한쪽 실패 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 다음 회사를 확정한 뒤 퇴사를 말했다.
- 오퍼 수락, 입사 시기, 유급휴가, 희망 종료 시점을 미리 정리했다.
- 공고 탐색을 데이터 필터링으로 바꿔 사람이 볼 양을 줄였다.
- 충동적으로 단기 퇴사하지 않고 이력의 안정성을 지켰다.
- 감사해야 할 사람에게 감사했고 불필요한 충돌을 만들지 않았다.
우연히 잘 맞은 부분
- 이동 직후라 인수인계가 0이었다.
- 권한이 큰 관리자가 새 부서 쪽에 있었다.
- 휴가·결근·재직 기간 조정이 편리하게 승인됐다.
- 외부 오퍼 확정 시점이 옛 업무와 새 업무 사이의 빈틈에 정확히 떨어졌다.
결국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좋은 우연이 왔을 때 전부 주울 수 있었다고 보는 게 가장 정확하다.
19. 에필로그: “어? 벌써 없어?”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친한 관리자에게 “이동 루트가 될지 이직 루트가 될지 아직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다른 공장에서 마주치면 또 봐요”라고까지 했다.
그 뒤 연휴.
연휴 후 첫날.
이동.
퇴사 확정.
마지막 출근.
소멸.
나중에 다른 공장에서 나를 찾은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 벌써 없어?”
정확히는 일정 기간 재직 중이다.
다만 정상 출근을 하지 않을 뿐이다.
몇 년 있었던 회사인데 소문이 회사 한 바퀴 돌기도 전에 본인이 먼저 사라졌다.
그리고 본인은 거대한 감상에 잠기는 대신:
“서류는 내일 하지 뭐. 오늘은 게임.”
으로 끝난다.
갈등편, 이직편, 이동편, 퇴사편.
완주.
다음 편은 거대 연휴편이다.
20. 후일담: 알고 보니 이직 활동은 생각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돼 있었다
퇴사 절차가 거의 끝난 뒤, 예전 이직 사이트 기록을 아무 생각 없이 뒤져 봤다.
거기에는 꽤 오래전에 전문 부품 제조사에서 받은 스카우트와 면담 기록이 남아 있었다. 내 기억 속에서는 “최근에 본격적으로 이직을 시작했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로그는 달랐다. 훨씬 전부터 외부 회사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조달 계열 직무도 후보에 넣고 있었다.
기억은 남아 있었다. “베어링 비슷한 회사였던 것 같다”, “지방 근무 이야기였던 것 같다”, “면담 분위기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문제는 회사명이 섞여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번 이직은 갑자기 생긴 이벤트가 아니었다. 내가 이직이라고 부르기 전부터 복선은 이미 깔려 있었다.
그때그때 보면 인생의 사건은 단발처럼 보인다. 나중에 로그를 늘어놓으면 급전개가 아니라 장편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21. 기억은 회사명을 저장하지 않고 ‘베어링 회사’ 폴더에 전부 넣어 버렸다
옛 면담 상대를 떠올리려 했을 때 처음 생각난 회사는 다른 대형 제조사였다.
“여기 아니었나?”
하지만 기록을 확인하니 실제로 스카우트에서 면담까지 갔던 곳은 다른 전문 제조사였다.
내 머릿속에는 베어링, 제조업, 조달, 지방 거점, 이직 사이트, 예전에 대화함 같은 속성만 남고, 회사명 라벨은 나중에 다른 파일과 합쳐진 모양이다.
사람의 기억은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다. 그래도 자기 이직 역사를 감사하는 중에 이런 일이 생기면 “내 경력인데 제일 수상한 증인이 나 자신”이 된다.
결국 메일 기록이 이겼다. 기억 패배, 로그 승리.
22. 다른 회사를 비교할수록 다음 직장이 대체로 강했다
그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회사 비교가 시작됐다.
“저 회사 꽤 크지 않나?” “연봉은?” “국내 전근은?” “해외는?”
뭐든 바로 비교한다.
재미있었던 건 다른 유명 제조사를 하나씩 옆에 놓을 때마다 다음 직장이 계속 상위권에 남았다는 점이다. 상대 회사들도 충분히 큰 회사고 처우도 나쁘지 않고 복지도 있으며 해외 사업도 한다. 그래도 내가 중요하게 본 기준, 즉 보상, 근무 방식, 지역 적합성, 직무 내용, 앞으로의 상승 여지를 묶어서 보면 다음 직장의 약점이 의외로 적었다.
세계 최고의 회사를 뽑았다는 뜻은 아니다. 내 기준표로 채점했을 때 큰 구멍이 별로 없었다는 뜻이다.
오퍼를 받았을 때보다 다른 회사를 여러 개 옆에 놓고 난 뒤에 “이거 꽤 잘 잡았네”라는 감각이 더 강해졌다.
23. 조용히 퇴장하기 작전, 평범하게 실패
퇴사 쪽에서는 남은 행정만 조용히 처리하고 슬쩍 나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현실은 전혀 은밀하지 않았다.
남은 용무 때문에 회사에 다시 갔고, 다른 사람에게 짐을 좀 옮겨 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다. 사람들 앞을 평범하게 걸었고, 평범하게 마주쳤다.
은밀 작전, 즉시 종료.
게다가 퇴사 정보는 관리자층에 이미 공유돼 있었다. 그래서 스쳐 간 상대는 내가 막 이동했다는 것도, 곧 퇴사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머릿속 계산은 당연히 이렇게 된다.
“잠깐, 이동하고 하루 만에 그만두는 거야?”
그리고 실제 평가가 절묘했다.
“와, 제대로 했네 싶었어요.”
24. “제대로 했네”라는 말이 너무 절묘했다
그 표현에는 여러 감정이 동시에 들어 있다.
칭찬만도 아니고 비난도 아니다. 약간 어이없고, 좀 웃기고, 실제로 해냈다는 놀라움도 있고, 사정은 이해하지만 보통 사람의 속도는 아니라는 느낌도 있다.
풀어 쓰면 대략 이렇다.
- 과감하게 했네
- 진짜 실행했네
- 보통은 이렇게까지 압축하지 않는데
- 이유는 이해함
- 그래도 객관적으로 보면 꽤 세다
- 그리고 좀 웃김
이걸 한마디로 압축한다.
상대는 “진짜 놀랐다”고도 했고, 나는 “그 반응을 직접 못 봐서 아쉽네요”라고 답했다.
퇴사자와 잔류자의 대화치고는 매우 평화로웠다.
25. 사내 화면만 계속 “이동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더 웃긴 건 본인이 이미 퇴사 루트에 들어간 뒤에도 사내 이동 공지가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관리자 정보: 퇴사합니다.
사내 화면: 이동했습니다!
본인: 거의 집에 갑니다.
세 타임라인이 맞지 않는다.
표시만 본 사람은 새 부서에서 정상적으로 새 생활을 시작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장이 첫 화에 최종화를 맞았다.
새 부서 편, 총 1화.
조기 종영 만화도 이것보다는 설명이 길다.
26. “반달 정도 일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 루트를 “결근이 낫습니다”로 닫았다
회사 쪽에는 배려안도 있었다.
당장 정상 출근을 끝내지 않고 한동안 할 일을 만들어 계속 나오게 하는 방법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고마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다음 직장은 이미 정해졌고, 예전 업무는 넘겼으며, 새 부서 업무는 아직 제대로 맡지 않았다. 여기서 임시 업무를 새로 만들면 회사는 일을 만들고 나는 곧 떠날 일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나온 답이 사실상,
“결근 처리로 가는 게 좋습니다.”
문장만 보면 강하다.
상황을 뜯어보면 새 온보딩과 새 인수인계를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합리적이었다. 배려로 생길 수 있었던 연장 이벤트를 본인이 취소한 셈이다.
27. 잠수도 대행도 아니었다. 정식 절차 최단 주행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제일 웃긴 부분이다.
잠수 퇴사가 아니다.
퇴사 대행도 아니다.
싸우고 당일 나가 버린 것도 아니다.
이동 발령을 받고, 실제로 이동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퇴사 의사를 전달하고, 퇴사일과 휴가·결근 처리를 조정하고, 필요한 절차를 밟았다.
전부 정식 루트였다.
그런데 결과만 보면,
이동 → 하루 → 퇴사 루트 진입.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연휴 뒤 하루나 이틀만 나오고 끝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가족에게 했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깔끔하게 조건이 맞을 줄은 몰랐다.
옛 업무는 이미 정리됨. 새 업무는 아직 없음. 다음 직장 확정. 퇴사 의사 확정. 회사와 조정 완료.
꼼수를 쓰지 않았는데 최단에 가까운 길이 열렸다.
그래서 이건 무모한 퇴사라기보다 정식 절차 최단 주행에 가깝다.
28. 사정을 모르면 새 부서가 완전히 억울하다
외부에서 시간 순서만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동했다.”
“하루 있었다.”
“그만둔다더라.”
여기까지만 알면 당연히,
“새 부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라고 생각한다.
상상력이 더 좋으면 “하루 만에 손절하고 퇴사 대행 쓴 거 아냐?”까지 갈 수도 있다.
아니다.
새 부서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직장 조건을 듣고 나서는 보내 주는 쪽이 됐다.
새 부서는 완전한 누명이다.
원인은 이동 전에 이미 달리고 있던 이직 루트가 공교롭게도 이동 직후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었다.
인사 이력만 혼자 서스펜스를 만든다.
29. 에필로그: 결국 최고의 총평은 “제대로 했네”였다
돌아보면 나도 이동 하루 뒤 퇴사라는 장면은 꽤 세다고 생각한다.
제도상 가능했다.
사정도 있었다.
누군가를 곤란하게 하려고 한 게 아니다.
회사와도 정식으로 이야기했다.
그래도 장면만 잘라 보면 이상하다.
이동했습니다.
하루 일했습니다.
그만둡니다.
결근이 낫습니다.
이동 공지는 아직 떠 있습니다.
그럼 당연히 “제대로 했네”가 나온다.
게다가 오래전 이직 사이트 기록까지 다시 보니 이 하루짜리 퇴장은 충동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어진 바깥쪽 루트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안에서는 장편.
밖에서 보면 단편 한 편.
그 차이가 웃기다.
결국 가장 정확한 표현은 장황한 커리어론이 아니었다.
복도에서 스쳐 가며 들은 한마디였다.
“와, 제대로 했네 싶었어요.”
네. 제대로 했습니다.
참고 자료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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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ddell, H., Sedikides, C., & Ntoumanis, N. (2025). A meta-analytic review and conceptual model of the antecedents and outcomes of goal adjustment in response to striving difficulties. Nature Human Behaviour. 235개 연구와 1,421개 효과크기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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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오키나와 노동국의 연차유급휴가 상담 사례: 퇴직 예정자도 재직 중에는 연차휴가를 사용할 수 있으며, 퇴직일 이후로 시기를 변경할 수 없다는 설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