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시마에서 전철이나 열차를 타고 가다 보면 이상한 지형이 자꾸 보인다. 위는 비교적 평평한데 가장자리가 갑자기 뚝 떨어지는 언덕, 마치 칼로 잘라낸 듯한 급경사다.
처음에는 그냥 이런 생각이 든다.
“저 산은 왜 저렇게 생겼지?”
그런데 레이메이칸에서 시부시 우치조 성의 디오라마를 보면 이야기가 갑자기 연결된다. 언덕을 여러 개의 평평한 구역으로 나누고, 그 사이를 깊은 마른 해자와 절벽으로 끊어 놓았다.
“이렇게까지 산을 파놓고 건물은 왜 이렇게 적어?”
이 의문 하나에서 화산, 시라스, 산성, 사쓰마 무사의 분산 배치, 고주 교육, 류큐 무역, 세키가하라, 오키나와 전투, 그리고 오늘날 시부시항의 옥수수 물류까지 전부 이어진다.
박물관이 아니라, 아침부터 밖에서 본 가고시마의 정답지처럼 느껴진다.
1. 가고시마의 절벽은 왜 갑자기 떨어질까
가고시마 본토의 넓은 지역은 거대한 화산 분화 때 쌓인 화쇄류, 부석, 화산재 등의 퇴적물인 ‘시라스’로 덮여 있다. 레이메이칸 자료에 따르면 시라스는 가고시마현 본토 면적의 약 60%를 차지한다.
시라스 지형은 비교적 평평한 대지와 가파른 가장자리를 만들기 쉽다.
그래서 열차에서 보이는 “평평하다가 갑자기 낭떠러지처럼 떨어지는 산”은 그냥 이상한 산이 아니다. 가고시마의 화산 역사가 그대로 남은 지형이다.
그리고 중세 사람들은 그 지형을 보고 생각했다.
“이거 성으로 쓰면 되겠는데?”
2. 시부시 우치조는 ‘산 위의 성’보다 ‘산 자체를 성으로 만든 곳’에 가깝다
시부시에는 우치조, 마쓰오성, 다카조, 신조라는 네 개의 중세 산성이 있었고, 이를 합쳐 시부시성이라고 부른다.
우치조는 남북 약 600m, 동서 약 300m다. 길쭉한 언덕 끝을 이용하고, 뒤쪽 대지와 이어지는 부분을 깊은 마른 해자로 끊었다.
가장 압도적인 것은 큰 해자다.
지금도 깊이가 약 17m다. 발굴 결과 당시에는 지금보다 약 7m 더 깊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략 24m.
이 정도면 ‘도랑’이 아니다.
인공 계곡이다.
그래서 디오라마에 건물이 적어 보여도 이상한 게 아니다. 목적은 주택 단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평평한 구역, 절벽, 흙벽, 마른 해자, 좁은 출입구를 이어서 적이 쉽게 다음 구역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건물이 주인공이 아니다.
땅이 주인공이다.
지형 자체가 무기다.
3. “건물 몇 채 때문에 산을 이렇게 팠다고?”가 아닌 이유
현대 기준으로 넓은 평지에 건물이 적으면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세 산성의 평지는 아파트 부지가 아니다.
병력이 모이고, 물자를 두고, 울타리와 건물을 세우고, 적이 들어오면 싸우는 공간이다. 그리고 한 구역이 함락돼도 다음 구역에서 다시 막을 수 있다.
문 하나 부수면 최종 보스가 나오는 구조가 아니다.
중간 보스. 또 중간 보스. 또 중간 보스.
공격하는 쪽에서는 정말 귀찮다.
4. 그래서 가고시마에는 산성 유적이 많다
가고시마현은 중세에 전쟁이 잦았기 때문에 많은 산성이 만들어졌고, 그중 상당수가 시라스 대지의 절벽을 방어에 활용한 ‘남규슈형 성곽’이라고 설명한다.
지란성, 기요시키성, 시부시성이 대표적이다.
흐름은 단순하다.
화산이 시라스를 만든다
→ 시라스 대지와 급경사가 생긴다
→ 전쟁이 반복된다
→ 그 급경사를 성의 일부로 쓴다
에도 시대가 되면서 일본 각지의 산성이 정리됐지만, 사쓰마에는 옛 산성이 많이 남았다. 일본유산 자료에는 성을 무너뜨리면 흙이 밭으로 흘러간다는 이유를 내세웠고, 실제로는 비상시 군사 거점으로 남겨 두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한다.
사쓰마는 쓸 만한 지형을 버리지 않았다.
5. 성을 분산시키니 무사도 분산됐다
이제 ‘사쓰마 무사는 왜 지방 곳곳에 살았나’와 연결된다.
사쓰마번은 모든 무사를 가고시마 성 아래에 모으지 않았다. 영지를 100곳이 넘는 ‘도조’라는 구역으로 나눴고, 나중에는 113곳으로 안정됐다. 각 지역에는 ‘후모토’라는 무사 취락이 있었다.
평소에는 지방 행정을 맡고, 전쟁이 나면 그 지역 무사들이 그대로 부대가 됐다.
게다가 사쓰마는 무사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 가고시마현 자료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이 무사였다.
이들을 전부 가고시마 시내에 넣을 수는 없다.
그래서
옛 산성
- 방어하기 좋은 지형
- 무사 취락
- 지방 행정
을 묶어 각지에 배치했다.
성이 분산형이면 군대도 행정도 분산형이다.
이제 유적들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6. 그리고 등장하는 “교육 교육 교육 교육 교육”
무사를 지방에 정착시키면 아이들도 그 지역에서 키워야 한다.
여기서 고주 교육이 등장한다.
같은 지역의 무가 아이들이 모이고, 나이가 많은 ‘니세’가 어린 ‘지고’를 가르쳤다. 공부뿐 아니라 무예, 예절, 규율, 집단생활까지 익혔다.
가고시마 성 아래에는 번교 조시칸도 있었지만, 고주 교육은 지역 자체를 교육 장치로 만들었다.
성 분산
→ 무사 분산
→ 행정 분산
→ 교육도 분산
→ 다음 세대 무사를 지역에서 다시 길러낸다
교육 교육 교육 교육 교육.
사쓰마는 인력만 흩어 놓은 게 아니다.
인력을 계속 만들어내는 장치까지 흩어 놓았다.
7. 그런데 그 무사들이 기후까지 간다
사쓰마 안에서는 시라스 대지와 산성이 강력한 방어 보너스다.
그런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약 1,500명을 이끌고 기후에 있었다.
멀다.
너무 멀다.
서군이 무너진 뒤 시마즈군은 적진을 돌파해 탈출했다. 아이라시 설명에 따르면 사쓰마까지 돌아온 병력은 수십 명 정도였다.
가고시마 쪽에서 세키가하라를 보면 “천하를 가른 전투”보다 먼저 이런 생각이 든다.
“왜 가고시마 사람들이 기후까지 출장 가서 싸우고 있지?”
중앙에서 멀다는 점은 본거지를 지킬 때는 장점이지만, 중앙 일본에서 전쟁할 때는 이동과 보급 자체가 고통이 된다.
지리는 방패이면서 짐이기도 하다.
8. 가고시마는 남쪽 해상 물류의 관문이기도 했다
또 하나의 축은 바다다.
가고시마는 규슈 남단에 있고, 아마미와 류큐를 거쳐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이어지는 섬 사슬에 가깝다.
레이메이칸은 가고시마가 오래전부터 ‘남쪽을 향해 열린 문화의 창구’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류큐 왕국은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잇는 중계무역으로 성장했다. 시마즈는 1609년 류큐에 출병한 뒤, 류큐를 통한 중국 무역에서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교역하기 좋은 위치였다”라고만 말하면 부족하다.
사쓰마에는 경제적 이익이 있었지만, 류큐에는 군사적 지배와 정치적 제약이 겹쳤다.
같은 항로도 누구의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래도 지리적 사실은 분명하다.
가고시마는 일본의 끝이면서 동시에 남쪽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9. 전쟁이 되면 같은 위치가 위험한 장점으로 바뀐다
교역에 좋은 위치는 전쟁에도 좋은 위치가 될 수 있다.
1941년 지란에는 육군 비행장이 건설됐다. 처음에는 비행 교육용이었지만 전쟁이 악화되면서 오키나와와 가깝다는 이유로 특공 기지가 됐다. 1945년 4월부터 오키나와 방면으로 출격이 시작됐다.
미나미큐슈시 자료에 따르면 지란에서 출격해 전사한 것으로 확인되는 인원은 431명이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남쪽과 가깝다
→ 배가 오가기 쉽다
→ 교역에 유리하다
전쟁이 되면
남쪽과 가깝다
→ 전선과 가깝다
→ 군사기지로 유리하다
지도는 같은데 의미가 뒤집힌다.
10. Amazon 시대에는 가고시마가 오키나와행 필수 경유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Amazon에서 오키나와로 가는 물건은 가고시마를 반드시 거칠까?
그렇지 않다.
Amazon은 전국의 물류 거점에서 출고하고, 자체 배송망과 야마토운수, 일본우편, 사가와급편 등 여러 배송망을 이용한다. ‘오키나와행은 반드시 가고시마 경유’라는 고정 규칙은 공개돼 있지 않다.
일본우편의 유팩도 본토 여러 지역과 오키나와 사이에서 항공 운송을 사용한다.
비행기와 대형 선박이 발달한 지금은 중간 지점을 하나씩 밟을 필요가 없다.
과거의
본토
→ 가고시마
→ 오키나와
라는 구조가 필수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가고시마 물류가 약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11. 시부시항을 보면 현대 가고시마 물류의 진짜 강점이 보인다
현대 가고시마는 전국 화물이 반드시 지나가는 중계지라기보다 남규슈 산업을 지탱하는 물류 기지로 강하다.
대표가 시부시항이다.
나가사키세관에 따르면 2024년 시부시에서 수입한 사료용 옥수수는 약 163만7천 톤으로, 수량과 금액 모두 일본 1위였다.
가고시마현 자료에 따르면 옥수수 같은 주요 사료 원료는 미국, 브라질 등에서 들어와 항구 주변 공장에서 배합사료가 된다. 한 지역 조사에서는 출하처가 가고시마현 약 52.6%, 미야자키현 약 46.8%였다.
즉,
미국·브라질의 밭
→ 벌크선
→ 시부시항
→ 사료 공장
→ 가고시마·미야자키의 소·돼지·닭
이라는 거대한 흐름이다.
예전에는 류큐와 중국으로 이어지는 해상 교역.
지금은 세계의 곡물을 받아 남규슈 축산업을 움직인다.
역할은 바뀌었지만 항구의 중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가고시마 돼지고기 뒤에 브라질 옥수수가 서 있다.
역사가 갑자기 밥상까지 들어온다.
12. 무사 문화가 현대의 ‘사스큐’를 만들었다고 말해도 될까
여기까지 오면 현대 일본 인터넷 용어인 ‘사스큐’까지 연결하고 싶어진다. ‘역시 규슈’라는 말을 비튼 표현으로, 규슈에 남아 있다고 여겨지는 성차별적 관습이나 행동을 비판할 때 쓰인다.
역사적 재료만 보면 그럴듯하다.
사쓰마에는 남성 무사 집단이 있었다.
고주 교육도 무가 남자아이 중심의 집단 교육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남존여비적 관습이 그 잔재일까?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사스큐’라는 말은 실제 성차별 경험을 드러내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규슈 사람 전체를 하나의 이미지로 묶어 지역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
무사 사회와 고주 교육을 지역 가치관의 긴 역사적 배경 중 하나로 검토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사쓰마 무사
→ 현대 규슈 남성
→ 성차별
이라는 직선 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에도 시대부터 오늘날까지는 근대 가족제도, 학교교육, 산업화, 도시화, 전후 가족문화 등 엄청난 변화가 끼어 있다.
역사는 연결하면 재미있다.
너무 연결하면 신화가 된다.
여기서는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13. 결국 시작은 “저 산 왜 저래?”였다
처음에는 열차 창밖의 이상한 급경사였다.
거기서
화산
→ 시라스
→ 절벽
→ 산성
→ 도조와 후모토
→ 무사의 분산 배치
→ 고주 교육
→ 세키가하라 원정
→ 류큐 교역
→ 전쟁기 비행장
→ 현대 항만 물류
까지 왔다.
가고시마 역사를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시마즈 나리아키라 같은 인물 이름 암기로 보면 피곤하다.
하지만 지리에서 시작하면 이해가 훨씬 쉽다.
왜 이런 산인가.
왜 성터가 많은가.
왜 무사가 지방에 흩어졌나.
왜 교육도 지역에서 돌렸나.
왜 류큐가 중요했나.
왜 1945년에 비행기지가 중요했나.
왜 오늘날 시부시에 옥수수가 엄청 들어오나.
답이 계속 ‘장소’로 돌아간다.
박물관에 가기 전에 모든 것을 공부할 필요는 없다.
현장에서 “이게 뭐지?”를 하나 주워서 바로 조사하고, 다음 전시에서 앞의 의문을 확인해도 된다.
한 질문이 다음 질문을 만든다.
이런 여행은 꽤 재미있다.
